오래된 친구가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고, 그 친구가 고1이었던 2002년 겨울 처음 알게 되었으니, 햇수로 24년동안 알아온 셈이다. 10대시절부터 어느덧 40대를 목전에 앞둔 긴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봐왔던 건 아니지만 틈틈이 서로 어찌 사는지는 대충 아는, 가늘고 긴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방황하던 10대에서 놀기 좋았던 20대 초반을 넘어, 그 친구와 나 모두 이제 사회의 구성원으로 1인분의 삶을 꾸려가기 시작해야했던 2010년대 초반, 나는 그 친구에게 몇 권의 책을 추천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한 권 정도였는데, 얼마 전에 그 친구와 얘기해보니 내가 그 때 꽤 많은 책들을 추천했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내가 추천해준 그 책들을 꽤나 열심히 읽어 왔다는 사실도 10여년만에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몇 년 전, 그 친구가 뜬금없이 나에게 보낸 카톡이 떠올랐다.
"니가 읽어보라고 했던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됐어.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게 이뤄지면 그건 너의 도움이 컸다는 걸 알아둬"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책, 들었던 노래, 보았던 영화 등을 타인에게 공유하며, 상대가 그걸로 인해 조금이나마 울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다. 당시 저 메시지를 받고 가슴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일렁였던 기억도 난다.
올해 초 육아휴직을 하고 난 후, 난 그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었다. 대략 10여년 만이었다. 대화를 하다가 각자 항상 곁에 두는 '반려책' 이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친구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을 자신의 반려책으로 꼽았다. 집에 와서 돌아보니, 이미 장바구니에 두 번이나 넣었던 책이었다는걸 알게 됐다. 여행을 다녀오고난 후, 지난 주말부터 오늘까지 난 이 책을 내 곁에 두며,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내 오랜 친구는 그 세월동안 어떤 문장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까? 그리고 친구로 하여금 이 책을 만나게 된 지금의 나는, 어떤 문장을 가슴에 품게 될까? 탐험하듯 읽었다.
이 책은 철학 에세이이다. 두 편의 에세이(자기 신뢰, 운명)과 한 편의 강연(개혁하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기 영혼이 말하는 목소리를 따르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 자기의 본성, 자기의 기질을 따르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과 자연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만약 Chat gpt에서 위와 같이 이 책의 핵심 내용만을 단편적으로 접하게 되었다면, 나는 시시하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수천년 전 고대 철학자들부터 20세기 정신분석학, 심리학, 그리고 현대의 성공한 사업가들까지 동일하게 이야기해왔던 내용이므로 사실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이 진리를 바라봐왔고, 이야기해왔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결국 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이야기했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조금씩 다르다. 각자가 각자의 시대를 살며, 이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원전을 직접 맛보는 방법밖에 없다. 어쨌든 이번에는 19세기 미국에서, 신앙을 기반으로 이런 사상을 펼쳤던 랄프 알도 에머슨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은 철학 '에세이' 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론서처럼 무언가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연역적으로 이끌어내지 않는다. 오직 저자의 사상을 설파할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나는 사실 이렇게 계몽적인 톤의 철학 에세이를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존 스튜어트밀의 '자유론'은 그런 점에서 에세이이면서도 개론서의 역할까지 해냈던, 정말 알찬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선호와 상관 없이 자신의 사상을 거침없이 펼쳐내는 에세이는, 분명 고유한 힘이 있다. 이런 철학 에세이의 백미는, 소설처럼 캐릭터나 플롯에 주제의식을 숨기지도 않고, 개론서처럼 자신의 이론을 그럴듯하게 보여질만한 이론적 틀이나 방법론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용기에 있다. 어쨌든 이런 철학 에세이만의 맛을 느끼고, 또 작가가 주장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 몇 개 문단을 이 기록하며, 내 마음 속에도 새겨보고자 한다.
책 제목과 동일한 이 에세이의 텍스트는 눈으로는 어렵게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가슴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손에 잡히는 것을 쫓고, 측정 가능한 것을 진리라 믿으며 살아오는 방식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부세계에 기반한 삶이 너무나도 당연한 현대 사회에서 내면의 빛을 쫓으라느니,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느니 하는 말은, 미신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자체가, 사실 우리 스스로가 의식하지 않아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상반응이라면 어떠할까. 그러므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되,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허용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쩍거리며 지나가는 빛줄기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각 개인에게는 음유시인이나 현자들에게서 나오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불빛보다 자기 마음속에서 샘솟는 한 줄기 빛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생각을 별로 주목하지 않고 그냥 무시해버린다. -p14
이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갈지 않으면, 단 한 알의 옥수수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p15
우리 눈은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특정한 빛을 인식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을 절반도 옳게 드러내지 못하고,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성한 생각을 오히려 보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부끄러워 하지 말라. 그 신성한 생각은 자기 형편에 알맞고 확실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충실하게 밖으로 표현해야 마땅하다. -p15
누구도 자기 본성을 침해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의지의 표출은 결국, 그의 존재 법칙 안에서 제약을 받는다. -p27
인간의 행위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제때 맞추어 정직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면, 합치가 이루어진다. 여러 행위가 서로 닮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의 의지에서 나와으므로 조화를 이루는 까닭이다. -p28
당신의 진정한 행동은 스스로 설명할 것이고 다른 진정한 행동들도 거기 동참할 것이다. (중략) 내가 오늘 바른 일을 할 만큼 확고하며 남의 이목은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전부터 옳은 일을 많이 해왔으므로 지금 나를 변호할 수 있다. 어떻게 행동하든 지금 바르게 행동하라. 성품의 힘은 누적된다. 이전에 행한 모든 미덕은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p29
조용한 시간에 우리의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어떻게 솟아오르는지는 모르지만) 있음(being)의 느낌은 사물들과도 다르지 않고, 공간, 빛, 시간, 인간과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그 모든 것과 하나이며, 분명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데, 그 사물들의 생명과 있음도 모두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여기에 행동과 사상의 원천이 있다. 여기에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영감의 허파가 있다. 우리는 거대한 지성의 무릎 위에 누워 있다. 이 지성(로고스)은 우리를 그 진리의 수신자 그리고 그 행위의 기관으로 만든다. 우리가 정의를 알아보거나 진리를 알아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고 로고스의 빛이 우리 마음속을 통과하도록 허용할 뿐이다. -p35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구걸을 하지 않는다. 그는 기도가 곧바로 행동이 되는 것을 본다. -p50
힘(권력)은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아는 사람, 자기 밖이나 다른 곳에서 선을 찾는 자는 허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지체 없이 자기 생각으로 돌아가서 즉각 자신을 바로잡고 우뚝 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의 사지를 마음대로 부리고 기적을 일으킨다. 두 발로 서는 사람이 물구나무로 서 있는 사람보다 더 강하다. -p62
이 편에서는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해 다룬다. <자기 신뢰> 가 자기 영혼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한다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 <운명> 편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역학관계를 이야기한 에세이이다. <자기신뢰> 편이 눈으로 읽기 쉬운 에세이인 반면, <운명>은 자기신뢰보다는 쉽게 읽히진 않는다. 이 에세이에서는 <자기 신뢰>와 달리 여러 개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운명, 자유의지, 자연 등등)
그런데 저자는 쉽게 이 개념을 명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행간에 녹아들어있는 이 개념을 독자 스스로 정리하고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기 신뢰>보다 이 <운명>편이 좀 더 애착이 가는 편이다.
우리는 운명에 대해 대략 세 가지 견해를 가진다. "정해진 운명은 없다"라는 견해와, "정해진 운명은 있으며, 이것은 자유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견해"와, "정해진 운명은 있지만,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운명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치 "신은 있다", "신은 없다"와 같이 좀처럼 도저히 인간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좁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런 견해차는 '운명'이라는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너무 거대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관성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운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내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에머슨은 ‘운명‘을 일종의 '제약'과 '한계'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시간과 공간적 제약과 한계 속에서 산다. 특정 시대에 유한한 생물학적 생을 산다는 시간적인 제약이 첫번째이며, 공간적 제약이 두번째이다. 공간적 제약의 범위는 바로 옆에 있는 것부터 저멀리까지 확장할 수 있다. 가장 가까이는 가족이라는 제약, 조금 넓게는 사회라는 제약, 더 넓게는 국가라는 제약, 이 지구라는 제약.
사실 이 제약과 한계는 공기같아서 우리는 이것이 존재하는지도 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이 제약과 한계 안에서만 살지 않는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산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마치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저 주어진 '조건', 즉 '자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운명'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함만 거둬내면, 우리는 사실을 바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이 제약과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부정한다고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인간은 이 한계와 제약을 인지하고 있을지언정 이 안에서만 수동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제약과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항상 이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존재이다. 이 <운명>편은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이 편의 주제 의식은 운명에 '맞서싸우는' 태도가 아닌, 운명과 '조화를 이루며', 내 자유의지를 '행동'으로 펼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운명> 편은 좀처럼 구절을 쉽게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앞뒤 맥락을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췌된 텍스트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체 다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그래도 몇 구절 뽑아보겠다.
운명과 자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하학은 주도적인 사상들의 거대한 궤적을 잴 수 없고, 어떻게 귀결되는지 목격하지 못하며, 사상들 사이의 대립을 화해시키지도 못한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극성을 따를 뿐이다. 이 저항할 수 없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깊이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p66
아무리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명령을 이해해야 한다. 즉,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에 못지 않게 자유, 개인의 유의미함, 의무의 엄숙함, 성품의 힘 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자유)이 진실이라면 저것(운명)도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하학은 이 양극단을 가로질러 그 둘을 조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각각의 생각(운명과 자유)에 솔직하게 복종하고 되씹어본다면, 우리는 그것들(운명과 자유)의 힘을 마침내 알게 된다. 다른 생각에 대해서도 복종해봄으로써 이들을 서로 조화시킬 수 있다는 합리적인 희망을 갖게 된다. -p67
만약 우리가 이 시대를 연구하려 한다면 이렇게 해야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주제들을 하나씩 꺼내들고, 그 주제에 관해 즐거운 것을 모두 기술하고, 또 다른 주제에 대해 즐겁지 못한 사실을 모두 기술하면, 진정한 한계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어떤 주제를 한쪽으로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을 바로잡으면 적당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p67
사람들은 정신적, 물질적 편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형제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p76
과학 분야에서 우리는 힘과 환경이라는 두 요소를 고려해야한다. 우리가 알(egg)을 연속해서 관찰한다고 해도 그것이 여전히 알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다. 5백 년이 흐른 후, 더욱 뛰어난 관찰자가 더 좋은 관찰 기구로 그 알을 관찰해도 여전히 그것은 알이다. 식물과 동물 조직에서도 알 상태는 마찬가지인데, 소포에는 여전히 원초적인 힘이나 경련이 작용한다. 그렇다. 환경은 독재자 같은 힘을 발휘한다! -p78
한때 우리는 적극적인 힘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에 이제 우리는 소극적인 힘, 즉 환경이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을 안다. 자연(본성)은 두꺼운 두개골, 껍질 두른 뱀, 육중하고 바위 같은 턱과 같아서 마치 독재자와 같은 환경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자연이다.
자연의 책은 곧 운명의 책과도 같다. 자연은 거대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지만, 예전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법이 없다. 자연이 한 페이지를 내려놓으면 화강암층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천 번 지나가고 점판암 층이 생긴다. 또 천 번의 시대가 지나가면 석탄층이 생기고, 이회암과 진흙층이 나타난다. 식물 형태도 생기고, 최초의 흉한 생물류인 식충류, 삼엽충류 그리고 어려가 등장한다. 자연은 이런 형태 속에서 미래 상의 개요만을 보여준다. -p79
운명이 거대하긴 하지만 이 중 세상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힘 또한 거대하다. 만약 운명이 힘을 따라오면서 제약하려 든다면, 힘은 거기에 맞서서 운명을 적대시한다. 우리는 운명을 자연사로서 존중해야 하지만, 그안에는 자연사 이상의 것이 있다. 이 문제를 파고드는 비평은 누가 하는 것이며 무엇 때문인가?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날것 그대로가 아니다. 즉, 자루와 자루, 배와 기관, 연쇄 사슬의 한 고리가 아니고, 부끄럽기만 한 마대 자루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 맞서는 엄청난 적대적 힘, 우주의 양극을 함께 끌어당기는 존재다. -p86
운명을 올바르게 활용하려면 우리 행동을 자연의 고상함 쪽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자연은 그 자체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거칠고 무적이다. 인간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의 가슴에서 공허한 자만심을 제거하고, 자연과 같은 수준으로 매너와 행동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권을 보여야 한다. 목적 의식을 중력의 당김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권력, 설득, 뇌물도 자기 목적을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 인간은 강, 참나무, 산 같은 존재에 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흐름, 그런 쑥쑥 뻗어감, 그런 우뚝함을 갖추어야 한다. -p88
제약이나 한계가 인간의 성장을 재는 척도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제약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운명에 맞서는 것은, 어린아이가 집에서 벽을 등지고 서서 눈금을 새기며 해마다 자기 키를 확인해본는 것과 같다. -p95
운명이란 아직 생각의 불길을 통과하지 않은(즉, 아직 생각해내지 못한) 사실을 일컫는 이름이다. 아직 온전히 파고들지 못한 사건에 대한 이름이다. 혼란은 마치 인류를 멸종시킬 것처럼 때때로 분출한다. 우리는 지성을 활용하며 그 혼란을 건전한 힘으로 바꾸어놓을르 수 있다. 운명이란 아직 온전히 파고들지 않은 사건이다. -p96
생명이 생기는 순간, 자기 보존의 방향성이 설정되고, 물질을 흡수하며 사용한다. 생명은 자유이며 자유의 양에 직접 비례하여 꽃을 피운다. 새로 태어난 아이도 무기력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확실히 안다. 생명은 그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작동한다. 당신은 아이의 체중이 고작 몇 파운드에 불과하고 그저 피부 속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이 손을 내뻗고, 환히 웃고, 뭔가를 내던지는 아이가? 작은 촛불도 1마일까지 그 빛을 전할 수 있고, 사람의 눈동자는 모든 별을 향해 그 빛을 보낸다. -p102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난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사람은 자기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고.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이걸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다. 그냥 경험적으로 알 뿐이다. 자기를 속이고 에고의 속삭임을 따라 살아간다면, 당장 손에 뭔가를 얻을 수는 있을지언정 뭔가 가슴 한구석에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과 우울감이 밀려온다. 나 또한 그걸 느껴왔다. 그리고 이런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었던 작년 8월의 어느 날,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이 어느날에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해보겠다.
어쨌든 이 책과 함께한 요 며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정작 이 책만 읽어서는, 이 책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현시키기는 어렵다고 나는 본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자기' 아는 것부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신뢰' 라는 것은, '자기' 가 바로 서야 하는 걸 전제로 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이 '자기'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아니, 그런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조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자기 신뢰' 텍스트가 실질적으로 이 이야기들이 효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부터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들도 많다. 칼융의 정신분석학 책들도 좋고 수천년 전부터 이것만을 파왔던 불교와 동양철학 서적들도 좋다. 요즘 많이들 읽는 명상 서적들도 좋다. 시간이 되면 이런 책들에 대해서도 한번 써보도록 하겠다.
두번째 이유는 이 '자기에 대한 믿음' 이 자신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타인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을 때에 오류 가능성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은 틀렸다' 라고 전제를 할 때, 우리는 독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법을 잃어버린다. 내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면, 타인도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음을 항상 인정해야 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자유가 있다면, 타인도 그에 대한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자유가 있음 또한 항상 명심해야 한다. 결국 이 세상은 나 혼자서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현실이 펼쳐지지 않는다고 하여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내 중심을 지키며 살되, 이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좀 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하겠다. 물론 <운명>편이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긴 한데,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운명은 읽기에 쉬운 텍스트는 아닌듯 하여 다른 책들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일단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많이 떠올랐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이나 후설의 상호주관성도 떠오른다. 어쨌든 여기에 대해서도 시간이 되면 한 번 기록해보고자 한다.
아무튼 이 책에서 각자가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내 오랜 친구와 조만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5년 8월 5일 오전, 단지 내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