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것.

10여년 전 이야기이면서 지금 이야기이기도 한 이야기.

by 이유진

오늘 친구와 식사를 하면서 나눴던 얘기다.


친구 |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한때는 내가 모든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전문가라는 사람의 강의들을 들어도 '어 저거 아닌데?' '내가 더 나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이걸 깨는데 한 3,4년 정도 걸린 것 같아


나 |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


친구 | 어느 날 또 전문가라는 사람한테 강의를 들었는데,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라서 '아 저거 틀리네'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집에 와서 책을 찾아보니까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거야! 그 때 알았어. 아 사람은 겸손해야하는구나.


나 | 오빠,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는거 알아?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현명하다" 라는 말.


친구 | 아.. 무슨 뜻인지 알것 같아.





그래. 내가 다 안다고 착각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2011년, 광고대행사에서 AE로 본격적인 직장 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누구나 처음에 다 그렇듯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신입사원이었더랬다.

내가 속했던 팀은 수의계약으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들보다, 경쟁PT에 참여해서 수주해야 하는 건이 많은 팀이었다. 대학교 때 많은 철학서나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었던 터라, 이야기하려는 바를 비교적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던 나에게는 딱 맞는 팀이었던 것 같다.


입사한지 한 달차쯤, 드디어 첫PT에 참여하게 되었다. 빌링이 워낙 큰 건이라 이례적이게도 상무님이 PM을 맡아서 꽤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다. 그 때 내가 맡은 일은, 막내들이 익히 하는 '팩트북' 을 만드는 것. 접근 가능한 외부 정보들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 클라이언트가 속한 업계 동향이나, 자사, 경쟁사의 상황 등에 대한 정보들을 모으고, 그 정보들을 토대로 implication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문서를 출력해서 회사 내 OA실에서 제본을 뜨고, 제법 두툼한 팩트북을 들고 상무님한테 전달 드렸다. 상무님은 팩트북을 쭈욱 보시더니 나중에 자리로 와서 잘 만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칭찬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부풀어오른 나는, 혼자서 그 PT의 스토리라인을 시놉시스처럼 써보고, 상무님께도 전달 드렸다. 그것은 실제 문서에 일부 인용되기도 했었다. 경쟁이 워낙 치열했기에 그 PT는 안타깝게도 떨어졌지만, 만 23세였던 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그저 모든 과정이 즐겁기만 했다.


어쨌든 그 이후에도 새로운 경쟁PT 참여는 계속되었다. 업무 시간에는 기존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운영과 광고주 대응을, 저녁 시간 이후부터 새벽시간까지는 경쟁 PT를 위한 회의를 하는, 하루를 두 번 사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새벽 2,3시까지 비좁은 회의실에 다닥다닥 모여 졸음을 쫓기 위한 커피와 선배들이 내뿜는 담배연기를 같이 마시며 끝도 없는 회의를 했다. 그래도 난 재밌었다. 아직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도 거뜬했고, 원체 야행성 인간이라 새벽에도 그리 힘들진 않았던 것 같다. 새로운 시장과 기업을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그게 먹히든 말든 내 논리를 써보는 것 자체가 참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야근수당 따위는 나오지 않았고, 월급은 200만원을 조금 넘겼지만, 새로운 PT를 시작할 때마다 서점에 가서 도움이 될만한 각종 서적들을 2,3권씩은 개인적으로 사서 읽곤 했다. 이번 PT에는 이런 접근을 해볼까, 이런 이론을 인용해볼까 마음껏 고민했던 시절.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영혼만큼은 충만했다.


하지만 과정이 아닌 결과로 증명해내야하는 팀장님의 입장에서, 높지 못한 PT의 승률은 굉장한 스트레스로 작용했었던 것 같다. 결국 내 입사 1년만에 내 첫 팀장님은 퇴사하셨고, 잠시 임시 팀장님한테 위탁되었다가 곧이어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지만 또 다시 1년도 안되서 퇴사하셨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다보니 2년차때쯤 얼떨결에 처음으로 경쟁PT의 PM을 맡게 되었다. 빌링 3억짜리라 규모는 작았지만(물론 작았기에 2년차 사원에게 맡긴 거였겠지만), 신규 광고주였기 때문에 수주하게 된다면 나름 의미가 있는 PT였다. 내 기억으로는 기획자는 나 1명, 제작 2명정도 붙어서 PT를 준비했고, 전체적인 컨펌은 이사님(위에서 얘기한 상무님 아님)이 해주셨다. 그 때 그 PT를 준비하며, 지금도 나의 인생책인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 의 플롯 구성을 기획서에 녹여보는 시도를 처음 해보았다. 이사님은 그 기획서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하셨고, 어쩌다보니 내가 광고주 앞에서 발표까지 직접 하게 되었다. 광고주 앞에서 100장 짜리 기획서를 40분에 걸쳐 발표 하면서, 사람 심장이 이렇게 뛰는구나 라는 걸 처음 느껴보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안좋아하는 성격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엔 더했다. 연구하고, 사유하고, 정리하는 재주는 있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는 것은 그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다.

이미 앞서 다른 업체들의 발표를 받았을 광고주 앞에서, 오랫동안 홀로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하는 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거리에서 혼자 사람을 찾는 일처럼 막막하고 외로운 것이었다.

어쨌든 첫 PT 발표는, 아주 망하진 않았지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다행히 발표 후에 광고주와의 Q&A 시간에, 이사님이 많은 부분을 커버해주셨고, 그 덕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 첫 PT는 수주라는 결과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오만했던 24살의 나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 나 좀 하는가보다‘ 자만했다. 수주한 PT건을 실제 집행하면서 그 이후로도 몇 개의 경쟁PT들에 참여했고, 몇 개를 더 수주하기도 했다.


2014년 퇴사 직전 마지막 PM으로 참여했던 경쟁PT는 당시로서는 꽤 큰 10억짜리였다. 3년차 AE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지만, 감사하게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유종의 미를 장식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내가 여태까지 작성했던 그 어떤 기획서보다도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 아웃풋이었다. 거의 밤을 꼬박 새고, 오전 10시에 종로에 있는 광고주의 사무실에서 100장이 넘는 문서를 일일이 넘기며 발표하는 일은 , 나에게 정말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함께 PT장에 갔었던 이사님은, 발표가 끝나고 사무실로 복귀하며 "impressive한 발표였다"고 격려해주었고, 이 말이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11년이 지난 최근, 이제는 창업하여 대표님이 된 그 이사님을 다시 만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됐다.


"그 때 니가 썼던 그 기획서 아직도 애들한테 보라고 돌려봐. 회사 막내가 쓴거라고 하면서."



마지막 PT를 준비하며 가졌던 다짐


쟁쟁한 대행사들이 참석했던 그 PT를 우리가 수주했다는 소식은, 첫 회사 퇴사를 앞 둔 일주일 전 이사님으로부터 전해들었다. 다른거 다 떠나서 '내용'때문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광고주의 코멘트도 함께 전달해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도 내가 첫 회사에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설령 실패할 가능성이 있을지언정, 막내사원에게도 충분한 자율성을 주고 그들 개개인의 창조성을 믿어주었던 선배들 덕분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걸 몰랐다.

‘이제 여기서 내가 배울 수 있는건 다 배웠다’

‘이제 여기 있는 웬만한 선배들보다 내가 잘해’

26세의 나는, 이런 자만섞인 확신 속에서 나는 후련하게 첫 회사를 떠났다. 이 회사를 다닌지 만 3년 1개월 되던 날이었다.




첫회사를 퇴사한지 일주일만에 출근한 두 번째 회사는 조중동 중 하나인 메이저 언론사의 자회사였다. 2014년, 그 당시 매체사들은 디지털 전환기를 맞이해야하는 숙명이었기에 부랴부랴 회사 내에 디지털 조직들을 셋팅하고, 디지털 경험이 있는 경력직들을 뽑았던 시기였다. (2025년 AI시대에 '디지털' 이라는 말을 쓰니 정말 구시대적이기 그지없다)

전체 임직원이 대략 300명쯤 되는 회사의 80%가 기자로 구성된 그 회사에서, 나는 당시 5명 미만 정도밖에 없는 '서비스 기획자'가 되었다. 다행히도 첫 회사에서 2년 넘게 앱을 기획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내 직무는 AE에서 서비스 기획자가 되어버렸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아니라 ‘어기’ (어쩌다 기획자)가 되어버린 셈.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 스스로를 ‘서비스 기획자’ 라고 정의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와이어프레임을 어떻게 그리고 디자이너에게 어떻게 요청을 해야하고 개발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심사는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등등과 같은 프로세스나 방법론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외주사의 입장에서의 경험에 불과했다. 광고대행사에서 출시했던 앱은, 일반 대고객향이 아닌, 직원들의 업무를 위한 툴과 같았기 때문에 서비스의 방향성이나 운영 방안, 마케팅 방안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성은 이미 광고주의 RFP에 친절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난 이 요구사항을 잘 실현시켜주는 역할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서비스의 오너십을 가진 회사에서, 서비스를 고도화해나가고 운영해나가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었다. 더군다나 이 회사는 종이책을 만드는 회사였고, 당시 내 직속 팀장님 조차도 디지털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으셨던 기자 출신이다보니, 서비스 기획에 대한 본질적인 조언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정말 나는 운이 좋았다. 다행히도(?) 그 서비스는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스타트업이었지만 지금은 대기업이 되어버린 IT회사와 제휴하여 만든 서비스였고, 그 당시 '그 IT회사'는 모바일 생태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여러 기업들과 그러한 방식의 제휴 서비스를 출시하곤 했다.(지금은 사라진 모델임)


우리 회사(매체사)는 콘텐츠와 광고영업, 그리고 서비스 운영을, 그리고 그 IT회사는 서비스 기획과 디자인과 개발 외주 컨트롤로 R&R을 나누어, 이미 내가 입사하기 5개월 전에 출시한 상태였다. 제휴 프로젝트였지만 어디까지나 이 서비스에 대한 소유권은 ‘그 IT회사' 가 아닌, 우리 회사(매체사)에 있었기에, IT 회사의 인력이 계속 타 회사 소유의 서비스의 유지보수나 운영, 고도화까지 담당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에,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서비스 기획을 내재화하기 위해 나를 채용한 것이었다.


아, 난 그 때 처음으로 비로소 '찐 IT인'을 만났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 IT회사'의 서비스 기획 리더와 실무자가 판교에서 신사까지 방문해서 우리와 회의를 함께 하곤 했다. '그 IT회사'의 서비스 기획 리더는 속은 따뜻했지만 겉으론 까칠한 캐릭터였다. 우리 회사 기자 선배들이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으면 좋을' 기능에 대한 요구사항들을 마구 얘기하면 그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기능이 있으면 어떻게 운영할건데요?"
"지금 있는 기능들도 제대로 워킹하지 않잖아요"
"레퍼런스로 가져온 이 서비스,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요? 카이스트 애들이 만들었어요"



초반에는 나는 이런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피드백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회의를 했던 그 몇개월의 시간동안, 나는 자체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첫 회사를 퇴사하며 다 안다고 자만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새로운 게임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르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쯔음 '소크라테스의 변명' 을 읽었다.


2014년 9월의 나.




그리고 이 시기는 비단 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들이나 고민들도 많았던 시간들이었다. 어찌됐건 이 시간을 지나오며 나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진리' 나 '정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오로지 해석과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소크라테스가 말한 無知의知, 즉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는 구절과, 로버트 맥기의 책에 나오는 <그가 선택하는 곳이 곧 그의 존재를 설명한다> 라는 구절,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한 것만 같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3권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내 삶의 태도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런저런 생각은 그를 의혹으로 이끌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하게 방해하였지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생활하고 있을 때에는 그는 자기의 마음속에 올바른 재판관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꼈고, 그 재판관이 가능한 두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판가름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짓을 했을 경우에는 이내 그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나는 무엇인가, 또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또 언젠가는 알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살하게 될까봐 두려워할 정도로 자신의 무지를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인생에서의 자기 특유의 일정한 길을 굳게 지키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 안나 카레니나 3권, 474p




여전히 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고, 앞으로도 무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선택들을 계속 하며 살아야 한다. 무엇이 절대적인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 때 그 때,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수 밖에 없고, 내 선택이 가져다주는 현실에 그냥 몸을 내던지고 살 뿐이다. 물론 그 선택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때론 실익을 잃는 결과를 안겨다 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미래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선택’ 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실패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실계를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생각들을 종종 망각하며 산다. 나또한 지금은 잠시 야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임을 안다. 수개월 후 현실계 속에 다시 뛰어들게 될 내가, 또다시 나의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오면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세상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눈 앞의 삶을 경험하고, 내 자유의지에 따라 기꺼이 선택하는 것 뿐이라고. 몰랐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고,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또한 실은 아무것도 몰랐음을 자각하는 그 순간만이, 삶에 동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단지 그 뿐이라고.










ps.

비록 당시 같은 회사 소속은 아니었고 함께 일했던 시간은 짧았지만, 내가 자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내 스승과도 같았던 '찐IT' 인이었던 그 분은 2년 전 몇 해동안 앓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0도 채 되기 전이었다. 장례식장엔 아내와 초등학생인 자녀 둘이 씩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16년 이후로는 거의 들어가지 않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매년 내 생일때만 되면 꼬박 생일 축하글을 남겨주었던 그의 마지막 내 생일 축하글은 2023년 1월 27일에 멈춰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달 전이었다.


나는 지난 몇 년동안 2개의 회사를 더 거쳐, 2021년부터는 그가 그 때 당시에 다녔던 '그 IT회사'를 본사로 둔, 모 자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입사 초기, 그룹사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시스템에서 이미 예전에 비활성화된 그의 닉네임을 검색해서 10여년 전 글들을 찾아보곤 했다.

그 당시 우리의 서비스에 대해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것만 같았던 그는, 사실 누구보다 이 서비스에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난 10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낳자마자 입양보내야 하는 아기와 같은 이 서비스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홀로 회사의 동료와 임원들을 설득하고, 인력을 투입하고, 시간과 열정을 쏟아왔던 그의 흔적들을 보며, 그가 회사에서 얼마나 고군분투 했을지, 어렴풋하게 상상이 된다.


몇 년동안 투병일기를 자신의 sns에 업로드해왔던 그에게 언젠가 "판교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라는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줄 알았다. 그 때 우리랑 일하기 진짜 힘들었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이 IT바닥과 판교를 경험하면 할수록 정말 물어보고 싶은게 많아졌지만, 결국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것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몰랐던 것을 하나 더 알게 해준 그 분께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또 한 번 전한다.



-2025년 6월 14일 새벽, 내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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