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ler 공연장에서 만난 잡지 만드는 한 청년을 만난 이야기
위대한 것들은 이미 내곁에 있고 난 위대한 것들을 곁에 두는 삶을 산다.
위대하지 않은 것들은 가판대에 있는 무가지 같은 것이다. 가져가도 되고 안가져가도 아무 상관 없다.
위대한 사람들이 만든 것을 찾아 읽고, 듣고, 보고 위대한 사람들이 한 말을 곁에 두자. 그럼 된다.
어제(9/13), Tyler의 공연을 보기 위해 지하철역을 내려 킨텍스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했던 생각이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켠에 품은 채로 일상을 산다. 세간의 소음이라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내 태도랄까.
무가치한 모습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 지하철 앞에 쌓인 무가지를 대하듯이 쓱 지나치고 내 갈 길을 간다. 시끄러운 소음들이 들리면 라디오 채널을 돌리듯 주의를 돌려버린다. 대신 충분히 몰입할 가치가 있는 것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궁금증을 자아내고 마음을 쏟고 싶은 사람들과 온전히 진심을 나눈다. 그래서 별거 하지 않아도 괜시리 가슴이 풍요롭다. 여튼 요즘 나는 그러고 산다.
Tyler의 공연을 보러간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그의 음악을 아주 즐겨듣던건 아니지만, 그가 작년에 낸 <CHROMAKOPIA>는 참 인상깊게 들었다. 요즘 세상에 보물같은 앨범이다. 자신의 취약성을 온전하게 드러냈기에, 완벽한 앨범이다. 내면의 비루함이 드러날까봐 그것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센척하고, 상대방을 압박하고, 상황을 통제하려들면서 자기 안의 불안함을 애써 은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Tyler는 자신의 가면과 자신의 그림자를 오롯이 드러낸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앨범은 위대하다.
전성기 뮤지션의 모습을 보고싶다
내가 이 공연을 가기로 결정한 단 한가지 이유였다. 그는 몇 년 후에도, 혹은 십여년 후에도 어쩌면 내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로지 지금일 것이기에. 그것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기에. 무리한 일정이고 무리한 거리였음에도 직접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티켓부스에서 표를 교환하고, VIP 머천다이즈를 받은 후, 나는 다시 킨텍스 바깥으로 나왔다. 스탠딩공연이었기에 물품보관소를 이용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있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CHROMAKOPIA>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한공연 전문 서비스에서, 설문 스티커를 붙이면 직접 만든 타일러 가내수공업 스티커를 준다길래 스티커를 붙이고 타일러 스티커 두장도 받았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날씨가 좋아 나무 밑에 있는 화단 밴치에서 잠시 쉬면서 VIP머천다이저에 있는 굿즈들이 뭐가 있는지 주섬주섬 열어서 보고 있었다. 한참 보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 제가 만들고 있는 잡지에 대해서 잠깐 설명드려도 괜찮을까요?"
고개를 들어보니, 많아봤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젊은 청년이 책자 하나를 들고 서있었다. <CHROMAKOPIA>의 키컬러와 동일한 배경색의 소책자였다. 왠지 호기심이 들어서, 무엇보다 그 청년의 표정이 너무나 맑았기에 나는 "네 그러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 청년은 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내 옆에 앉아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 공연 보러 오신거죠? 제가 타일러를 굉장히 좋아해서 이 책을 만들었어요. 저는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될거거든요. 저는 이 책자와 함께 오늘 공연을 사람들이 더 잘 즐겼으면 좋겠고, 이걸 들고 다녔으면 좋겠고, 이게 멋있었으면 좋겠어요.
<CHROMAKOPIA>가 10월 28일에 나왔는데 제 생일도 10월 28일이거든요. 타일러 내한을 기념해서 제목은 <CHROMAKOREA>로 했어요. 여기 보시면 각 트랙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들이 있어요. I KILLED YOU 가 어떤 배경에서 나온 노래인지 혹시 아세요? 흑인들의 곱슬머리가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그걸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기자는 노래에요. 그리고 자신의 곱슬머리를 공유할 수 있는 이 사진 프레임을 제가 만들었어요. (중략) 마지막에는 오늘 공연의 셋리스트를 적을 수 있게끔 구성했어요. 제 인스타를 팔로우하신 분들께 이 책자를 무료로 드리고 있어요. 아, 근데 오늘은 다 나눠드려서 드릴게 없는데..내일도 혹시 오세요?
실제 그 청년이 말한 것과는 살짝 뉘앙스가 다를 수 있지만, 대략 내용이나 맥락은 이러했다. 한 때 잡지사에 다녔던 사람으로서, 또 한 때 이런 종류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시도는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내수공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한 책자를 만들고 그것을 같은 뮤지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줌으로써,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 젊은 청년이 너무 아름다워보이고 대견해보였다.
2-3분가량의 책자 설명 스피치를 마치고 나는 와- 하며 박수로 화답했다. "그거 좀 줘보시겠어요?" 하며 그 청년이 손에 들고있던 책자를 건네받고 책장을 넘기며 나는 물어봤다.
"와 진짜 너무 좋아요. 이런 레이아웃도 다 직접 디자인하신거에요? (네 제가 전공자는 아니라서 조금 어색할 수는 있어요) 아녜요 정말 좋아요. 그럼 지금 졸업하신거에요? (네 졸업했는데 제가 과는 이쪽이랑 전혀 상관없는 토목공학과거든요. 졸업하고 공기업이나 공사 같은 곳으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힙합을 좋아해서 결국 다시 이쪽으로 오더라구요)"
“저는 릴스 같은거는 잘 안맞거든요. 그래서 좀 더 오래 남을 수 있는 이런걸 만들고 싶었어요. (그럼 앞으로도 뮤지션 시리즈로 계속 내실 계획이세요?)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패션이나,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주제로 낼 생각이에요. 이건 라이센스가 제 것이 아니라 판매를 못하지만 나중에는 펀딩으로 해볼 생각도 있어요. (오오 너무 좋아요) 저는 진심을 믿거든요. ”
"아 저도 동의해요. 저도 진정성의 힘을 믿어요. 진정성은 절대 못이기는것 같아요. 그게 느껴져서 정말 좋아요."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친구들한테 설명하면 잘 이해를 못하던데 .."
"음.. 맞아요. 사실 여기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위대한 것들은 사실 우리 주변에 있고, 우린 그걸 너무 쉽게 선택할 수 있잖아요. 사실 오늘 여기 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위대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위대한 것들을 선택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도 밈이나 릴스같은 건 체질적으로 잘 안맞는 부류의 인간이에요. 세상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택할 수 있잖아요. 나는 그런 것에 힘을 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잘 안봐요. 나는 이런 것(이 책)에 힘을 싣고 싶어요.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걸 억지로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존재로 증명하시면 될 것 같아요. 나무 밑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지금 이 모습.. 너무 좋아요. 너무 예뻐요!“
그리고 나는 약속했다.
"제가 증인이 되어드릴게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ooo에요) oo님이 꿈을 이루면, 제가 그 때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할게요. 아 맞어. 저 사람 그 때 2025년 9월 13일 킨텍스에서 자기 꿈을 나한테 얘기했었어. 정말 그렇게 됐네 라고."
청년은 몰래 숨겨두었던 하나 남은 책자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아까 다른 사람 몇명에게는 못줘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갔는데 오늘 이렇게 관심가져줘서 너무 고맙다며. 자기한테 꼭 필요한 말이었다면서. 오늘 이렇게 호객행위 좀 더 하려고 했는데 이걸로 됐다며. 근처 이모집가서 밥 먹고 공연봐야겠다며.
자기가 제대로 하는지 안하는지 지켜봐달라고 했다. 제대로 안하면 혼내달라고도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서로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 청년은, 자기한테 용기가 되는 말을 해줘서. 나는, 본인이 만든 작업물을 통해 이렇게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줘서. 오늘 공연 즐겁게 보라는 말을 서로 나눈 후, 나는 공연장으로 들어갔고 그 청년은 가방을 정리했다.
공연장 건물 안으로 들어와 나는 의자에 앉아 한참동안 이 책자를 살펴보았다. 각 곡들에 대한 소개와 주요 구절들이 정성스레 담겨져있었다. 각 곡별 가사나 해석을 디테일하게 탐구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자 덕분에 정말 그 청년의 말처럼 이 앨범을 더 잘 이해하고, 오늘 공연을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날 이 책을 받아간 다른 99명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1명은 확실하게 본인의 의도대로 이 책자를 즐겼으니, 그 청년의 꿈은 이미 이뤄진 것 아닐까?
You are the light
It's not on you, it's in you
Don't you ever in your motherfucking life dim your light for nobody
이 앨범의 첫번째 트랙 <St. Chroma> 의 인트로 나래이션은 어쩌면 자신의 꿈을 가진 그 청년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앨범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앨범으로 자신의 첫 번째 작업을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모든 것은 필연인 것이 아닐까?
그 청년은 대화 중에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너무 당연한건데.."
나는 대답했다.
"맞아요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 처럼, 세상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또 반대쪽의 움직임이 탄생하는거잖아요. 이런 것(책자) 처럼요. 그건 너무 당연한 이치니까, 주변의 반대나 조롱이 있어도, 거기에 너무 분노하거나 저항할 필요도 없이 '아 너는 그래? 응 나는 내 갈길 갈게~' 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런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렇게 자기 이야기와 자기꿈이 있는 사람들을 보는게 참 행복하다. 이건 예전부터 그랬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어디서 주워들은 것, 남이 한 성공 이야기를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 재생하거나 남의 꿈을 내 꿈과 동일시하며 대리적 삶을 사는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누가 뭐라하던간에 그것을 용기있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세상은 그런 건 다 쓸데없다고. 한때의 치기라며 현실을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이 그런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 있는가? 가뜩이나 바람같은 세상앞에 꺼지기 쉬운 등불과도 같은 존재들인데, 나까지 그 빛을 어떻게든 끄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빛과 그림자를 드러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이 좀 더 다채로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보고 듣고 즐길거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꿈꾸는 세상이고, 내가 사는 현실이다.
그런 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 이 힘이란 엄청난 돈이 드는 것도, 그렇다고 거대한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 하나라도 진실되게,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켜봐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지만 충분한 일 아닐까. 진심으로 들어주고 좋은 대화도 나누니 원래는 받을 수 없었던 책자도 선물받는 일이 생겼다. 이 얼마나 나한테 이로운 일인가.
잡지를 만드는 것을 꿈꾸는 그 청년을 생각하며, 10년 전 잡지사에 다녔을 때 썼던 메모로 마무리.
세상의 모든 잡지에 경의를 표합니다.
매월 한 권의 Vol.은, 한 가지 캐치 프레이즈를 증명하고 실현하기 위해
매일 세상의 무한한 컨텐츠를 뒤집은 끝에 탄생한 결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