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니?
서울 용산구 백범로 326 1층
새벽 4시 30분, 나는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해가 빨리 뜬다. 하늘이 파랗고 아래쪽은 과일 같다.
새벽에밖에 볼 수 없는 달을 보는 일이 늘 어떤 기도에 응답을 받는 일처럼 느껴졌다.
- 그리고 그건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눈썹달 바로 옆에 점 같은 별이 하나 떠 있다.
몸에 있는 점 가운데 어깨 아래에는 삼각형 모양의 점 3개가 있고, 오른팔 뒤쪽에는 직선을 그리는 2개의 점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웃겼던 건 어느 날 콧망울 양쪽에 하나씩 점이 생긴 날이었다.
샤워를 할 때 보니 삼각형의 꼭대기에 있는 점은 아주 진해졌고 오른쪽 아래의 점은 흐려졌다.
서울 마포구 독막로 38길 5
새벽 5시 30분, 나는 무릎을 꿇고 창밖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래로 엷은 녹색 민소매를 입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공기에서 개의 냄새가 난다. 눅눅한 여름의 냄새.
사랑스러운 녹색 피아트 ㅡ 냉장고 같은 몸체는 책에서 읽은 그대로
수업을 하다 보면 나랑 상극인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몇 년 전에는 내 팔찌를 신기한 듯 보던 친구를 가르쳤다
ㅡ '이런 걸 진짜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네요? 너무 신기해'
너랑 나는 아홉 살 차이지만 같은 날 태어나 같은 반에 있다고 치자
분명한 건 네가 그린 그림을 보는 나의 감탄이 조금 투명해질 거라는 거 ㅡ 지금도 근사하지만
'쌤 빵순이에요?' - '응, 나 빵 진짜 좋아해' - '저도요!'
샤워를 할 때는
진단을 하는 시간이다.
괜찮아? 물으면 자판기처럼 대답이 나온다. 가장 모르는 것만은 신뢰할 수 있다 - 원래 그런 거야, 알지?
물속에 있으면 언제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몽중인과 레드 와인 슈퍼노바 -
하이힐
95년의 필름 같은 사람
어디 없나?
게다가 그 모든 건 '너를 좋아하게 된 이유' 이지, '지금도 너를 좋아하는 이유' 는 아니야.
─『 콜미로맨틱 』
오후 4시 30분, 나는 푸른 식탁보 같은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다.
줄줄이 달린 술과 보풀
촌스러운 꽃무늬, 뜨개질 냄새
망고는 차가울수록 좋다. 냉장고에 들어 있다.
낮잠은 불쾌하다.
나는 무릎 뒤쪽에 들러붙은 더위와 잠의 잔해를 느낀다. 개의 냄새 같은 4시.
바빌론, '나는 나보다 거대한 것을 하고 싶어.'
바빌론의 붉은색 황금은 편두통을 닮았다.
어딘가를 가는 날에는 열에 아홉 비가 온다 ㅡ 내가 태어나는 날에도.
수국의 보랏빛 냄새
생일에는 그 꽃을 사다 두어야지 생각하지만 - 너
작년에 그 축축한 케이크를 먹는 데 성공했니?
붉은 이불이 덮인 방에서, 기억이 사라지는 중에도,
기어코?
길고 미끄러운 샤워실, 고개를 숙이고 줄을 지어 선 세면대, 기억나지 않는 기하학의 타일,
기어코?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39 1층
새벽 4시, 나는 열이 난다. 집에 있는 독일 체온계는 온도가 높으면 노란색 화면이 된다.
달 아래에서 자는 것을 좋아한다. 거실의 불을 가능한 모두 끄면 마룻바닥으로 흰색의 면적이 드리워진다. 커튼의 한쪽이 물든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네 번.
네 번이 끝나면 다시 네 번.
눈을 뜨면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노크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린다.
글쎄 ... 나는 꼭 아픈 날에는 몸으로부터 정신이 멀어지더라. 어렸을 때 빨간색 피자 가게에 가면 사진처럼 치즈가 늘어나는지 궁금했어. 그래서 나는 입술을 모으고 쭉 팔을 늘이곤 했거든. 한 번도 그렇게 길게는 늘어나지 않았지만. 내 팔이 짧아서인지 사진의 치즈가 가짜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애는 꿈이랑 비슷해. 어린애들은 팔을 가만히 못 놔두거든. 주욱 늘어나는 것들도. 아픈 날에는 정신이 늘어나더라, 피자 치즈처럼. 동화 속의 이빨처럼. 어릴 때 두 눈으로 보았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것처럼.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니?
난 잠결에 본 네잎클로버 펜던트를 말하는 건데. 차에는 그런 게 한 번도 달려있지 않았다고 하니까 ...
눈을 감을 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똑, 하고 네 번.
잠결에 눈을 감고 나는 머릿속으로 나가!
외쳤던 것 같다. 그리고 잠들었다.
그 날은 여러 번 깼다.
꿈에 거대한 저택이 나왔다. 나무와 초록으로 가득찬 여름 저택이었다. 그 한가운데, 나뭇잎과 덩굴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붉은 기가 도는 금빛 머리칼을 가진 누군가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무 테이블 위의 까만색 수화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Here's a fine mess we got ourselves into,
My angel, my darling, true love of my heart. Etcetra. Must stop it, but I can't begin to.
─ 'Nine-line Triolet', 『The Orange and other poems』
1시 39분, H의 꿈.
시작은 어둑한 지하철 안이었다.
H는 양팔에 가득 교과서를 안고 있다. H는 팔을 누르는 책등과 종이의 날을 느끼며 걸어간다. 지하철 칸 안에는 사물함이 줄지어 서 있다, 사람처럼. H는 사물함 하나로 다가가 책을 정리한다. H는 책을 모두 넣은 사물함을 쇼핑 카트처럼 밀고 다닌다.
H는 지하철 안에 햇빛이 없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백화점에는 창문을 내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온다. H는 그것이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 자동문, 로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H는 어디에 있는 걸까?
지하철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기 때문에 문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거대한 입김 같은 따뜻한 바람이 밀려들어오고 있다. H는 이국의 과일 냄새를 맡는다. 발음하기 어려운 것들,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로만.
아, H는 지금 놀이공원의 코끼리 열차를 타고 있다. 창밖에는 어두운 거리와 초록색 마을 버스가 끝없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열차는 비탈을 올라 꼭대기에 도착한다. H에게 익숙한 어느 동네이다. 물론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H는 멈춘 코끼리 열차 안을 빙글빙글 돌며 계속해서 창밖을 본다. 과일과 버스와 거리와 어둠과 노래가 무겁게 깔린 채로 달리고 있다. 색깔이 몸을 옮겨다닌다. 검은색 과일과 초록색 어둠과 하얀색 버스가 보인다. H는 그것들보다도 지하철 안의 공기를 더 불쾌하게 느낀다. 이 열차는 자정능력을 잃었다.
그리고 H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서울 용산구 두텁바위로 88 B101호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니?
괜찮아, 원래 길을 낸다는 건 그런 거야. 물어봐! 질문은 그런 거야. 넌 답을 모르는 질문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해.
서울 서대문구 홍연 4길 33 1층
무지갯빛 용수철 장난감, 기억하니?
계단에서 미끄러뜨리면 한 계단씩 띠용띠용 내려가는 거, 알지.
난 그걸 정말 긴 계단 위에서 가지고 논 적이 있어. 얼마나 기냐면 구불구불한 기둥까지 있었던 계단이었어. 계단다운 계단, 있지. 궁전에 있을 것 같은, 매끈한 나무로 된. 어렸을 땐 그 위로 온갖 신비가 걸어다닌다고 생각했어. 초상화의 기억, 어둠, 새벽 5시에 푸른 해가 떠오기 전의 무서움, 유리장의 열쇠, 비밀... 그 집에서 자는 게 무서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거기서 나는 엉덩이를 끌며 가위바위보를 하며 내려오곤 했어. 이길 수 있어야만 내려왔는지 져야만 내려왔는지는 몰라.
계단은 그런 거야. 방향을 가진 것. 원을 그리는 용수철의 모든 무지개 단들처럼, 그 계단의 나선형을 포갠다고 하면 원이 되겠지? 모든 가위바위보 끝에 용수철이 그 계단을 다 내려왔다고 하자. 그때에야 보게 되겠지. 원 안에 없는 모든 것들, 전등을 켜는 스위치, 전등을 끄는 스위치, 사탕을 담는 박스, 사탕을 버리는 박스, 나무 기둥, 뾰족한 나뭇잎, 무지개보다 어지러운 수국의 형형색색 - 응... 아무도 모르게 계단을 걸어다니는 그 모든 신비처럼 ㅡ 띠용띠용 불안해하던 용수철도.
그러니까 어떤 것도 확실할 수 없다는 건 사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야. 신기하지 ... 넌 이제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는 힘을 가져. 원 안에 없는 것들을 믿을 힘을. 아니, 아니 그런 것들은 다 신비라고 하더라도 - 넌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돼. 무섭지? 괜찮아, 넌 배워야 해. 그럼 보일 거야.
봐, 이리 와, 이제 말해 봐. 네게 부재하는 것들을. 그건 잃은 것들이 아니니까.
평생에 다시는 못 할 정도로 맛있는 밥을 해서 저녁 먹자. 오늘이 아니면 절대로 다시 못 볼 것만 같이 이상하게 환한 달 아래서 ㅡ 스트로베리문, 블루문, 울프문, 스터전문, 블러드문, 슈퍼 블루문 그보다 더 희귀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 맛도 못 느끼고, 아무것도 안 보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말하는 거야. 여기 없는 것들은 곧 네가 아는 것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