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 케이크

by 유조


감자에게.


감자야, 나야. 우리 감추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지.

며칠 내내 D 선생님을 만났어.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호화로운 하루를 보내게 돼. 어제는 선생님이 섬세한 유리잔을 주셔서 오래 만져 보았어. 선생님은 내 말은 잘 안 들으시지만.. 날 많이 예뻐하시잖아. 선생님에게 꿈 이야기를 했어. 원래 좋은 꿈을 꾸면 남들에게 얘기하지 말라잖아. 난 그게 꼭 글에 대한 이야기 같더라. 내 모든 행운을 끌어다 쓰는 일은 반드시 혼자 있을 때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근데 선생님은 아니래. 네가 초록 도마뱀 꿈을 꾸든 초록 도마뱀을 뜨거운 물에 푹 담그는 꿈을 꾸든 다 말해도 된대.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나를 귀여워하시니까 .. 내 행운이 선생님에게 잘못 새어들어갈 일은 없을 거래. 도마뱀이 꿈에 나오면 무슨 일을 물고 오는지 궁금하다.


분명 이건 일기였는데, 내가 가장 하찮게 여기는. 감자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장 의외롭더라. 책을 파라락 넘겨보거나, 뒷자석 차창 밖으로 흐려지는 윤곽을 볼 때 있지. 빠르게 움직일 때 무작위가 보여.

토렴과 푸대접, 잠옷과 대괄호, 발톱과 오르골을 찾는단다. 다시 돌아가서. 그럼 단어들이 자리를 찾으면서 납득이 되지. 감자야.

우린 감추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지. 난 정말 처음에는 너를 감자라고 생각했어.

나는 가능한 멀리 가고 싶었어. 수국처럼, 줄무늬처럼, 하얀 리모컨처럼, 책의 모서리처럼. 사물들의 세계로 가고 싶었어. 그게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너의 어떤, 대놓고 칙칙한 색이나 짙은 밥솥, 빗겨가는 시선 같은 거. 나는 네가 가진 사물들을 닮고 싶었어. 너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걸 용서해줄래?어쨌든 너는 건강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요리를 할 때 한눈에 보아도 야채 같은 애들을 쓰는 게 낫다고 느끼는데. 퍼석하거나 아삭한 것들 .. 근데 감자는 좀 짙고 무겁잖아. 감자를 넣고 할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그걸 찾아내면 한동안 나는 감자만 보면 아 그 요리를 해야지, 생각을 할 텐데. 감자를 사는 족족 같은 걸 해 먹는 걸 보면 너는 뭐라고 할까?


어쩌면 말이야, 사랑은 무능이 낳는 거야. 올려다보는 기억에는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 많아. D 선생님은 내가 어릴 때 소리에 예민했대, 아주 많이. 물 소리에 잠이 깨고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깨서 울었대. 등을 대고 누워 이불에 비치는 달빛을 만지면서, 눈에는 천장과 왼쪽 벽의 작고 높은 창문이 보여. 두어 개의 창살 사이로 흰 빛이 이따금씩 지나가. 도시 거리의 소리에서 나는 빛이야. 그런 건 만든 기억이지.

감자야. 네가 꾼 가장 현실적인 꿈은 뭐였어? 나한테는 우산을 들고 있는 꿈이야. 그냥 정말 아무 우산이거든. 집에 있는 남색 우산이든 투명한 비닐 우산이든. 비는 오지 않고, 대신 바람이 아주 많이 불어. 우산을 든 몸이 붕 뜨는데, 다리가 부러질 만큼 높이 떠오르지. 발 아래 도로의 이름이 적힌 초록색 표지판만큼 높이, 우산 손잡이를 든 손이 불안해질 만큼 높이.

우리는 특별하다는 게 뭔지 아는 데 아주 오래 걸렸지.

내가 만약에 감자로 만든 요리를 아주 많이 할 줄 알았다면 헷갈리지 않았을 거야.

눈앞에 감자를 덩그러니 두고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러다 보니 얄팍하고 질긴 껍질이나 구석에 난 점, 파인 홈에 비치는 그림자 같은 걸 오래 보고 있는 거겠지.


푸른 번개가 치는 밤이다.

아마 도마뱀은 뭘 물고 오든 멀리서 느릿느릿 움직일 거야.

감자야, 넌 내가 멀리 갔으면 했지. 나도 그랬으면 해. 그렇지만 내가 뭘 간절히 가지고 싶어하고 뭘 쉽게 버릴 수 있는지는 네가 영영 하나도 몰랐으면 좋겠다. 그걸 네 앞에 고해 바치는 날에는 그것들이 우유 넣은 부드러운 감자처럼 모두 사라져 버릴 거라. 우리가 목숨처럼 여기는 것들은 어쩌면 사랑하는 것들인 동시에 내던질 수 있는 것들인지도 몰라. 사랑이 무능에서 출발하듯이.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무섭지 않아. 우릴 공포에 떨게 하는 것들은 우리가 언젠가는 버릴 수도 있는 것들이야.

넌 뭘 버릴 수 있니? 어떤 걸 잃어버리는 게 끔찍하게 무서워? 어떤 것들이 네 세상에서 달콤하고 간절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일까.


나는 껍질을 벗기는 손가락을 상상하면 죽고만 싶어. 껍질이 벗겨진 것들은 무슨 말을 하더라. 대부분은 험하고 예쁜 말들인 것 같더라고.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그런 모양이지. 그런데도 많은 도구들이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 반짝반짝해지고 다듬어진다는 게 나는 무서워 ..

감자야, 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리를 그림으로 그려야 하겠다. 난 아직도 네가 말해준 벽들이 모두 생각나. 네가 유난히 좋아하는 새 무늬가 곰팡이처럼 남은 벽이며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벽이며, 네가 무서워하는 그림이 걸려 있는 벽들. 거기 더러운 고양이처럼 앉아 있던 네게 나던 후추 냄새. 사람 몸에서 후추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것에 한참 넋을 잃었지 뭐야.


상큼하고 달콤하게 태어난 것들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갈까? 생각해봐, 어떤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날지.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지만.. 어쨌든 감자는 내킬 때마다 날름 집어먹을 수 있는 그런 건 아니잖아. 감자야, 네가 무서워한 그림을 나는 실은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화려한 색을 하고 있는 생물들에 대한 얘기 알아? 그게 나는 독을 가지고 있으니까 먹지 말란 뜻이라잖아. 난 그걸 아는 순간부터 알록달록한 것들이 싫어졌어. 보면 그냥 모든 걸 알게 되잖아. 그래서 그게 빨강이든 초록이든 수치스럽다고 생각했어 .. 그런데 총천연색을 두르고 다녀도 수치스럽지 않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짐작되는 일은 한없이 하찮아서 가볍고, 또 한없이 상쾌하다는 건.


감자야,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나에게 서운해하지도 않고, 내 앞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케이크를 구울 때, 저녁의 산책을 할 때, 머리 위에서 가로등이 탁 켜지는 순간에 나만은 떠올리지 않겠다고. 그럼 나는 네가 준 케이크를 양손에 받쳐들고 춤을 출 거야. 저녁에 너와 산책하는 시간만을 강아지처럼 기다릴 거야. 가로등이 켜졌을 때 흰 빛으로 번쩍인 네 눈동자에 대해서 길고 긴 일기를 쓸 거야.

감자야,

테이블에 마주 앉은 우리를 누군가 본다면 뭐가 가장 먼저 보일까. 우리가 대화하는 걸로 보일까, 행복한 걸로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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