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것은 편지가 아니지 않을까?
아이는 모직으로 된 외투를 여몄다. 주머니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울렸다. 고요하고 흐린 아침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흙길은 비가 와 질척거렸고, 말라붙은 잔디 위의 겨울나무들은 양쪽으로 검게 야윈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아이는 그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아이의 눈앞에 첨탑이 보였다. 솔즈베리 대성당이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누런빛의 조각들과 십자가가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그 오래된 성당을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고성(古城)의 분위기는 늘 쓸쓸한 아침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는 외투 위로 팔을 문지르며 회색빛 첨탑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찌푸린 시선을 옮겼다. 날카롭게 솟은 조각이 아치로 된 문 위에도 놓여 있었다. 낡은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리자 아이는 쥐새끼처럼 안으로 밀려들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자 마치 정해진 일처럼 아이의 고개는 위로 끌어올려졌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길었다. 사방에는 조각상들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저 높은 곳으로부터 다시 천장까지 이어지는 색유리에서는 흐린 빛이 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의 마음에 든 것은 촛불들이었다. 아이를 환영하듯, 양옆에서부터 황금빛 온기가 줄을 지어 밝혀져 있었다. 아이는 촛불의 행렬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나무 십자가까지 길게 난 복도 끝에는 촛불이 꺼진 것인지, 애초에 없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어둠이 있었다.
아이는 발소리를 울리며 걸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희미하게 밀려드는 아침의 빛은 저 앞에 주저앉은 누군가의 실루엣 주위로 일렁이고 있었다. 먼지가 그 속을 부유하며 떠오르고 가라앉았다.
가까이 갈수록 아이는 그 사람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은빛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헝겊으로 만든 인형이 들려 있었는데, 각각 머리에는 이니셜이 적혀 있었지만 아이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인형극을 하듯 세 개의 인형을 집어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도 그 앞에 앉았다. 아이는 눈을 찌푸려 이쪽저쪽으로 날아다니는 인형들의 이니셜을 읽었다.
E.C
J.L
A.L
그 인형들은 누구예요, 하고 아이는 물었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는 그의 이마에도 하나의 커다란 문자가 적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J……, Jackie(재키)!⌟
아이가 탄성을 지르자 그는 인형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내 보물상자로 보낸 편지를 보고 왔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거 아니었어요?⌟
그는 이상한 박자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게는 너무 어려웠구나! 제대로 못 읽은 거야.⌟
⌜아니에요. 너무 어려워서 열심히 읽었어요. ⌟
아이는 모직 외투 속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여러 번 접은 종이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그는 종이만큼이나 구겨진 손으로 그것을 들고 웅얼거렸다.
앨리스! 이 어린아이 같은 이야기를 가지렴.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이 이야기를 놓아두렴.
어린 시절의 꿈이
신비로운 기억의 띠로 얽혀 자라는 그곳에.
저 먼 나라에서 꺾은 꽃들로 만든
순례자가 쓴 시든 화관처럼.
(Alice! A childish story take,
And with a gentle hand
Lay it where childhood's dreams are twined
In Memory's mystic band,
Like pilgrim's wither'd wreath of flowers
Pluck'd in a far-off land)
⌜나는 순례자다.⌟
순례자!
과연 그의 머리칼은 아주 길어서 아이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럼 아주 오래 여행을 하다가 이곳에 와서 내 보물함에 편지를 넣어놓았군요? 언제 온 거예요?⌟
그는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세 인형을 차례로 앉혔다. 밑에 깔린 종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을 하고 있단다.⌟
⌜왜 끝이 없는데요?⌟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뭐가 갖고 싶은데요?⌟
그는 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멀거니 먼지 날리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세워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으나 그의 눈은 아이를 보지 않으려 하는 듯했다. 그는 손으로 인형을 들어 올리며 인형극을 하는 시늉을 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것을 가지고 싶었지.⌟
그의 손에서 인형이 떨어지자 그는 다른 인형을 집어 들었다.
⌜쌍둥이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고…….⌟
그는 다른 손으로 마지막 인형을 잡았다.
⌜조각상처럼 우러러볼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었단다.⌟
그가 두 손을 확 펼치자 인형이 모두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그것들을 보는 아이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나는 영원한……절대적인 것을 원한단다.⌟
아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종이 위로, 널브러진 인형들 위로 무릎걸음을 치며 나아갔다.
⌜이, 소름끼치는, 위선적인, 이, 헝겊처럼 얄팍한……인형들보다 더 위대하고 우월한 존재가 되기를 원해.⌟
그의 무릎이 인형들의 얼굴과 몸통을 뭉개고 구기고 있었다. 아이는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인생은 내게 그걸 주지 않더구나. 그래서 나는 떠돈다……. 너무나 오래전에 낡아버린 헝겊인형들 틈새에서.⌟
먼지 날리는 햇빛 속을 헤매던 그의 눈이 아이에게 되돌아왔다. 그를 보던 아이는 인형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인형을 좋아해요.⌟
아이는 그의 무릎에 깔리지 않은 인형 하나를 집어 올리고 살며시 흔들었다.
⌜그렇지만 얘는 말을 할 줄 모르니까……나랑 얘기도 하고 놀 수도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대꾸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계속 인형놀이를 하고 있어요? 인형이 싫으면, 딴 사람한테 주거나……그냥 같이 안 놀면 되지 않아요?⌟
그는 그의 무릎 밑에서 인형을 끄집어내어 아이가 했듯이 흔들었다.
⌜오랫동안 고민해보았단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안 할 수는 없는 건지……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보냈지.⌟
⌜왜요? 내가 인형들을 데려갔으면 좋겠어서요?⌟
⌜아니다. 난 네가 이 인형들을 버렸으면 좋겠어. 이미 다 낡아버린 나 대신 말이다. 그렇게 해주겠니?⌟
아이가 제법 단호하게 도리질을 치자 그는 아이에게 바싹 다가가서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속삭임은 먼지처럼 햇빛을 타고 떠돌았다.
⌜좋아. 좋아, 얘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 인형들은 나이가 아주 많아. 나만큼이나 오래된 것들이란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아주아주 많지. 슬픈 얘기도 있고, 나쁜 얘기도 있고, 무서운 얘기도 있지.
네가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이 인형들이 좋다면 그 땐 내가 이것들을 네게 주마. 몽땅 말이다.⌟
⌜정말요?⌟
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한 팔로 인형들을 모두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아이를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나무 십자가 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십자가의 아랫부분 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잡이를 더듬어 쥐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녹슨 경첩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자그마한 문이 위로 열렸다. 그 문은 아이의 키보다 몇 센티미터 클까 말까한 높이였다.
그는 아이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나 혼자 가요?⌟
⌜그래, 나는……이미 아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는 않구나.⌟
아이는 고개를 빼어 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눈앞에 램프 하나가 들어왔다. 그 뒤로는 끝없이 이어진 램프, 램프…… 끝을 알 수 없이 긴 홀의 천장에 수많은 램프가 한 줄로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슬며시 한 쪽 발을 들이밀었다. 램프들은 아이의 머리 바로 위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앨리스를 따라가거라. 그곳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문 너머로 그의 발소리가 울렸다. 아이는 그가 몇 발짝 안 가 아까처럼 바닥에 앉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정적이 사방으로 가라앉자 아이는 인형들을 한 팔로 힘주어 안고 다시 앞을 향했다.
물론 아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그러나 고요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사방을 둘러싼 수많은 문들과 커튼, 마지막으로 홀의 중앙에 놓인 투명한 유리 탁자, 무엇보다도 그 위에 놓인 유리병을 보자 아이는 확신했다. 그 생각은 욕조 물에 잠겼던 고무 오리가 둥실둥실 수면 위로 올라오듯 아이에게 떠올랐다.
여긴 앨리스가 왔던 곳이야!
아이는 환성을 지르듯 달음박질하여 유리병을 붙잡았다. 그 안에는 보글보글 기포가 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까 그 유리 같아.
아이는 램프 불빛에 병을 비춰보며 생각했다. 아이는 코르크 마개를 뽑으려다가 도로 탁자에 올려두었다. 아이는 바닥을 쓸듯 하며 홀 전체를 쏘다녔다. 물론 아이는 열쇠를 찾고 있었다. 유리 탁자 위를, 아래를, 바닥을, 커튼 아래를, 램프 주위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문을 열어줄 황금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열쇠가 없으면 어떻게 열지?
아이는 되물었다.
그 문은 어느 문이더라?
아이는 홀을 한 바퀴 빙 돌아가며 모든 문의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모든 문은 잠겨 있었고, 그 중 그 어떤 문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쩌지?
아이는 퍼뜩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앨리스를 따라가야지.
그래서 아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첫 부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앨리스가 물약을 마시고 작아지고, 커지고를 반복하다가 작은 문을 열고 나간다는 것이 전부였다.
섬광처럼 아이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작은 문!
앨리스는 모든 문들에 황금열쇠를 넣고 돌려보았지만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았다. 앨리스가 들어간 문은 그 문들이 아니었다. 앨리스가 황금열쇠로 연 문은……어느 커튼 뒤에 있던……작은 문!
좋아, 하고 아이는 생각했다. 아이는 커튼에 그 문이 가려지지 않도록 한 귀퉁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황금열쇠가 없잖아.
아이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금색의 예쁘고 조그마한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아이는 양 팔에 들린 인형들과 유리병을 힘주어 안았다. 앨리스가 이 조그만 문 너머로 보았던 아름다운 정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쩌지?
손잡이를 만지던 아이의 손가락에도 힘이 실렸다.
그 순간 문이 열렸고, 그 문에 꽉 차는 보름달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