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앨리스가 문을 도로 잠그지는 않았던 걸까?
아이는 물약을 마신 뒤 문을 열고 들어오긴 했어도 황금열쇠를 빠뜨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내가 멋대로 상상했던 걸까?
아이는 어둡고 차분한 밤빛도 책과는 다르게 느껴져 못내 생경했다. 아이가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을 때마다 발아래 풀잎이 소리를 울렸다. 풀잎들로 엮인 계단이었다. 손잡이도 지지대도 없는 계단은 거대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아래를 향해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을 때 아이의 눈에는 바로 아래쪽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강물이 들어왔다. 강물은 투명한 벽돌 빛에 훈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기 머금은 아지랑이가 한없이 긴 강물 끝에서부터 피어올랐기에, 아이는 저 멀리 어렴풋한 실루엣이 사람의 모양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그 그림자는 어두침침한 달빛을 거의 받지 못하리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발아래 풀을 밟으며 점점 다가갈수록 아이는 그것이 웅크려 앉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우스꽝스러운 모자 때문에 그림자가 괴상해보였던 모양이야!
과연 그 그림자는 거대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리본이 모자를 붕대처럼 둘둘 감고 있었다. 리본 틈새로 보이는 모자의 색깔은 검은색과 흰색, 붉은색과 보라색 말고도 여러 가지 색깔이라 아이는 그 모자의 원래 색깔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 옆에 웅크려 앉아 찻잔에 강물을 퍼 담고 있었다.
⌜저기…….⌟
일순 그림자에게서 와드득 하는 소리가 울리자 그의 손에 들린 찻잔에 베어 먹은 구멍이 생겼다.
⌜이런, 나를 놀라게 했어야지!⌟
아이는 어물어물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방금 제가 놀라게 했잖아요.⌟
⌜오, 까먹었구나, 몇 년 전에 티파티에서 왕이 나를 안심시키려다 내가 찻잔을 먹어버렸잖니. 그럼 이번엔 네가 날 놀라게 해야지 내가 차를 먹지 않았겠니.⌟
모자장수는 자신의 거대한 모자를 한 번 들었다 내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는 아이의 모직 외투를 잡아끌며 강을 따라 저편으로 걸었다. 저 멀리 어렴풋하게 식탁과 의자가 보였다.
⌜이해는 못했지만 어쨌든 죄송해요. 근데 저는 앨리스가 아니에요.⌟
⌜아니지, 너는 재키지. 인형을 들고 있잖니. 앨리스는 이제 초대받을 수 없어.⌟
⌜왜요? 왜 내가 재키예요? 왜 앨리스는 못 와요?⌟
⌜왜냐니, 앨리스는 이미 이곳에 있잖니. 당연히 앨리스는 이곳에 올 수가 없지. 그리고 당연히 네가 왜 재키인지 모르니까 너는 재키지. 내가 왜 나인지 알 것 같니? 내가 왜 나인지 알면 나는 내가 아니지 않았겠니? 너도 마찬가지지.⌟
그들은 어스름한 달빛 아래의 식탁에 다다랐다. 식탁은 아주 길었다. 식탁의 끝에는 아이의 머리칼을 닮은 금빛 쿠션이 놓인 빈 의자가 있었고 그 오른쪽 옆에는 다양한 모양의 시계와 부채로 장식된 의자와, 바늘이나 실, 가위, 리본, 천 같은 갖가지 바느질 도구로 장식된 화려한 의자가 차례로 있었다. 두 의자 사이, 식탁 위에는 거대한 회색빛의 털 뭉치가 있었는데, 아이는 그것이 부드럽고 푹신한 쿠션이라고 생각했다. 식탁보는 아름다운 레이스로 장식된 새것이었지만 여러 곳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누가 식탁보에 구멍을 뚫은 거예요?⌟
⌜글쎄 식탁보야 내가 만들긴 했지. 애초에 구멍이 없으면 그게 어떻게 식탁보(tablecloth)가 되겠니? 식탁(table)도 마찬가지겠지만, 세상에 누가 구멍이 없는 옷(clothes)을 원하겠어?⌟
모자장수는 화려한 의자로 다가가서 앉고는 찻잔에 따라온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금빛 쿠션이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 길고 큰 식탁에는 그 세 개의 의자뿐이었는데, 나머지 한 의자의 주인은 오래도록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아이는 물었다.
⌜한 사람이 아직 안 왔어요. 여기 앉을 사람은 누구예요?⌟
⌜3월 토끼는 오지 않을 거야. 지금은 겨울이거든. 3월 토끼가 미치지 않은 이상 겨울에 오겠니?⌟
⌜겨울이야. 미안함의 겨울이야.⌟
그 회색빛 털 뭉치에서 돌연 말소리가 났기 때문에 아이는 펄쩍 뛰어올랐다. 모자장수는 털 뭉치를 쓰다듬으며 덕분에 재키가 찻잔을 베어 먹지 않았다고 칭찬했다. 아이는 대단히 무례한 말을 하는 것처럼 느끼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그냥 쿠션인 줄로만 알았어요.⌟
⌜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네가 맞았단다, 동면 쥐 쿠션이야. 걱정 마. 그냥 겨울잠을 자고 있을 뿐이야.⌟
쥐에게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지만 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모자장수는 쥐를 쓰다듬으며 그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봐, 친구야. 앨리스도 나도 말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답을 재키가 찾으러 왔어. 네가 재키를 도와줘야 해.
모자장수는 털 뭉치에 대고 노래하듯 속삭였다. 아이는 모자장수는 어느 부분이 귀인지 아는지가 궁금했다.
⌜저, 저는 수수께끼를 풀러 온 게 아니에요. 저는 이 인형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재키가, 앨리스를 따라가서, 여기에 오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거든요.⌟
모자장수는 돌연 답답해하며 외쳤다.
⌜이런 바보 같은! 너는 지금 ‘나는 케이크를 먹으러 왔지, 티 파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같은 소리나 하고 있어!⌟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티 파티가 없으면 케이크가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잖니.⌟
그렇지, 티 파티가 있어야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아이가 이제는 제법 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머리 위에서 파사삭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식탁 왼쪽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서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미처 무언가를 묻기 전에 나무에서 검은 실루엣이 풀쩍 뛰어내려와 식탁에 내려앉았다. 그 겨를에 식탁에 올려두었던 모자장수의 찻잔이 엎어졌고 모자장수는 펄쩍 뛰어올랐다.
⌜체셔, 내 사랑스러운 친구!⌟
⌜미쳤군, 모자장수. 이곳은 재키의 삶이야. 저 아이는 알아서도 안 되고, 알 수도 없어.⌟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이야, 나는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잖니. 잊었구나, 나는 모자장수잖아.⌟
체셔는 과연 기묘한 동물이었다. 불길이 흐르듯 유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털의 빛은 어두운 달빛에 따라 바뀌곤 했다. 그가 식탁 위를 가로지를 때 푸르스름한 빛과 녹빛이 반짝거렸고, 모자장수와 말하는 중에는 타오르듯 하는 붉은빛과 오렌지 빛이었으며, 그가 몸을 돌려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는 은은하고 우울한 다채로운 보랏빛이었다.
⌜인형 따위는 내게 주고 너는 여기를 떠나. 이곳은 재키의 삶이고, 나와 모두의 삶이야. 나는 내 삶을 너에게 보여줄 마음이 없어. 그 인형들의 이야기는 너 같은 어린애가 이해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체셔의 털은 꼿꼿하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검도록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체셔의 눈동자 앞에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털을 만지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았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지 않도록 입술을 다물며 인형들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인형들의 목이 아이의 팔에 꾹 눌렸는데, 아이는 마치 자기 목이 눌린 것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
⌜난 인형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모자장수가 내가 재키랬어요. 난 내가 왜 재키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재키랬어요.⌟
⌜하지만 네가 왜 재키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는 재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 그리고 그 인형들의 이야기가 재키의 삶이고, 나의 삶이고, 모두의 삶이야! 이제 알아들었으면 사라져!⌟
오랜 침묵이었다. 아이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체셔를 설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체셔의 커다란 눈동자는 녹빛과 보랏빛, 주홍빛, 그리고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오로라……아이를 홀리는 아름다움이었다.
⌜Why is a raven like a writing-desk?(까마귀는 왜 책상을 닮았지?)⌟
모자장수가 불쑥 침묵을 깨고 읊었다.
⌜모자장수!⌟
⌜까마귀는 왜 책상을 닮았지?⌟
모자장수는 빙글빙글 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팔에 들린 인형 중 얼굴에 E.C 라는 이니셜이 적힌 인형을 빼냈다.
⌜이게 내 수수께끼고, 이게 나의 삶, 체셔의 삶, 재키의 삶, 그리고 이것이, 이 인형의 이야기야. 나도, 체셔도, 앨리스도 그 답을 말해줄 수 없어. 여기 동면쥐가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거고, 여기 내 사랑하는 친구 체셔가 너를 안내할 거야.⌟
⌜겨울이야. 미안함의 겨울이야.⌟
쥐가 다시 웅얼거렸다.
체셔는 모자장수를 노려보다가 그의 손을 덥석 물었다. 그가 한 발 물러났을 때 그의 손에 들린 인형은 사라져 있었다.
⌜안 돼요!⌟
체셔의 몸에서 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금빛은 냇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리고 식탁보 아래로 어렴풋하고 빛나는 실루엣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탁보에 뚫린 구멍으로 그 일부분이 보이고 있었다.
이내 체셔가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자 식탁에는 완연한 사람의 실루엣이 금빛을 내며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식탁보에 뚫린 구멍을 통해 부릅뜬 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누가 해준다는 것일까?
아이는 황갈색으로 거칠게 바스러지는 잔디를 손으로 쓸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여기에 누군가 있는데 내가 못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겨울의 바람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전부였다. 아이는 검게 마른 나무들 틈새로 깨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쓸쓸하게 흐린 날이었다. 아이는 몸을 바로 세우고, 깔고 앉은 잔디 몇 줌을 바지에서 떼어냈다. 아이는 황색으로 물든 잔디로 뒤덮인 땅 위에 앉아 있었다.
동면 쥐를 찾아야 할까?
고개를 뒤로 돌리던 아이의 눈에 회색으로 반질거리는 돌덩이가 들어왔다. 그것은 아주 컸으며 네모반듯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돌에는 파인 흔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글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EDVARD COLLIN
1808.11.2~1886.4.10
아이는 글자를 향해 몸을 기울이다가 발치에 놓여 있던 것을 밟았다. 그것은 두꺼운 책 같은 것이었는데,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빛으로 낡아 있었다. 아이는 그것을 들어 올려 말라붙은 잔디와 흙먼지를 털어냈다.
까마귀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울렸다.
아이는 책을 매만졌다. 누렇게 바래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불을 피워 몸을 녹인 여행자가 떠나면 남는 냄새였다. 아이는 자신과 나란히 앉아 있는 회색빛 돌을 응시하고는 빗돌의 글자들이 향한 앞쪽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겨울나무들이 안개처럼 옅어지는 저 먼 곳에는 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까마귀 소리와, 사방을 둘러싼 검은 나무들의 갈라진 얼굴, 황색으로 마른 잔디 한가운데에서 아이는 고요한 빗돌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책으로부터 인형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