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콜린(Edvard Collin)이 소년의 방문 앞에 섰을 때 그 문은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년의 방에는 일요일 아침의 햇빛이 스며든다. 소년이 에드바르의 집에 온 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날이었다.
방에 무겁게 드리워진 커튼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방은 어둡고 음침하다. 방 깊숙이 있는 침대는 어둠에 완전히 묻혀 있다.
에드바르는 소년을 바라본다. 소년의 옷은 새 것이다. 그러나 소년도 어둡고 음침하다. 또한 소년은 에드바르보다 세 살이나 많은데도 에드바르보다 작다.
⌜얼굴에 그 H는 뭐야?⌟
⌜이름이야.⌟
⌜이름이 뭔데?⌟
⌜Odense.(오덴세.)⌟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문 소년은 더욱 음침하다. 하지만 에드바르는 소년이 음침한 만큼 투명하다고 생각한다. 에드바르는 오덴세가 소년의 이름이 아님을 안다. 오덴세가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까지 알기 때문이다. 사방에는 홍차와 비스킷과 찻잔이 산산조각 나 뿌려져 있다. 그러나 에드바르는 엉망이 된 방을 들쑤시지 않는다. 그는 소년이 들고 있는 헝겊인형의 얼굴만 쳐다본다.
H는 표정이 없다. 소년도 그렇다.
⌜H는 어디에서 왔어?⌟
⌜Odense.(오덴세.)⌟
소년의 손에 들린 인형은 조용히 흐늘거린다.
⌜그곳은 좋았어?⌟
글쎄. 소년이 입속으로 우물거리다 고개를 돌린다. 반절만 쳐 놓은 진홍빛 커튼 사이로 10월 아침의 햇빛이 스민다. 빛은 싸늘하고 따뜻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아버지는 죽었어. 어머니는 없어. 다른 애의 어머니가 됐으니까.⌟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문다. 음습하다. 그러나 에드바르는 소년의 어둡고 축축한 손을 잡고 싶었다.
⌜재밌는 이야길 해 봐. 뭘 좋아하는지 같은.⌟
소년은 창문을 흘겨보다가 오덴세를 생각한다. 어두운 방에 창문 조각을 내는 가을 햇빛만큼만 떠올려본다. 강을 따라 시골길을 걸으면 회색빛 담배공장. 빨래가 줄에 널브러져 있는 골목골목을 뚫고 가면 어머니의 빨랫감 냄새같이 어둡고 음침한 집. 삐걱거리는 나무를 밟을 때면 주머니 속에서 부딪히던 동전.
⌜난 동전을 좋아해.⌟
소년은 손에 든 인형을 흔든다. 인형은 다시 흐늘거린다. H는 춤을 추고 있다.
⌜내가 인형놀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줘. 그 사람들은 아주 부자야. 그런 집엔 케이크도 많고, 방도 많고, 부채도, 레이스도, 부인들도…….⌟
소년은 하얀 셔츠 위에 입은 검은색 조끼를 매만진다. 소년이 입은 조끼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좋은 것이다.
⌜이런 걸 입은 신사들은……오덴세는 그랬어. 그건 여기랑 달라. 다른 점이야.⌟
에드바르의 아버지가 소년을 집으로 데려왔다. 소년은 코펜하겐의 모든 극단에서 거절당하고 뒷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이 그 날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신발이다. 소년은 더러운 돌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낡은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드바르는 자신의 조끼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인형의 커다란 얼굴 아래로 묶었다. 에드바르가 인형놀이를 하듯이 그것을 가볍게 흔들자 손수건은 옷처럼 묶이어 나풀거렸다.
⌜이젠 나랑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춤도 추고 장난도 칠 수 있어. 얜 이제 다른 역할을 맡은 거야.⌟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방을 보고 있다. 방은 어둡고, 네모나게 조각난 햇빛 속에는 먼지가 날린다. 소년의 옷과 구두는 새 것이며, 낡은 것은 버리고 없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의 방에서 가장 새로운 것이 에드바르임을 안다. 소년에게 에드바르가 묻는다.
⌜이름이 뭐야?⌟
⌜한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on).⌟
소년이 집에 온 지 한 달이 더 흘렀다. 소년의 방이 깨진 찻잔이나 빵조각으로 어지러운 날들은 줄어갔고, 소년은 필요할 때에는 익숙하게 조끼로부터 손수건을 꺼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방문은 그 뒤로도 항상 닫혀 있었는데, 에드바르만은 늘 그 방에 들어갔다. 소년의 역할을 바꿔주기 위해서였다.
에드바르의 아버지는 소년을 학교에 보냈다. 소년은 학교에서 문법을 배웠다. 소년은 다른 아이들보다 대여섯 살 많았다. 그곳에서 소년의 가는 머리와 어깨는 꼭 거인처럼 다른 아이들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칠판에 거칠고 딱딱하게 적히는 알파벳과 소리들은 꼭 날것처럼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아침이면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바르만은 늘 그 방에 들어갔다. 소년의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년은 아름답고 행복한 학생이 되어서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소년이 처음 시를 쓴 것은 학교에서였는데, 작고 오래된 방에서 죽어가는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소년의 선생님은 소년을 크게 칭찬해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시를 좀처럼 다시 쓰지 못했다. 소년은 시를 쓸 때면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의 누구도 소년이 언제 시를 쓰는지,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에드바르만은 늘 그 방에 들어갔다. 소년의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년은 풀밭에 누운 듯한 예술가가 되어서 시를 쓸 수 있었다.
소년의 방은 2층이었다. 그의 방 앞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었다. 붉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소년은 어둠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둠은 닫힌 방문을 소리 없이 뚫고 그의 머리맡에 서서 소년을 빤하게 바라봤다. 그런 날이면 소년은 죽음과 절망을 생각했다. 밤마다 소년은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바르만은 늘 그 방에 들어갔다. 소년의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년은 가장 편안하고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 있었다.
소년의 방문은 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에드바르만은 늘 그 방에 들어갔다. 소년의 역할을 바꿔주기 위해서였다.
복도에는 아무도 걸어다니지 않는다.
밤이 되면 벽에 걸린 그림들은 조용히 가라앉았고, 근사한 액자들이 발하던 황금빛은 해가 지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집은 아주 넓었다.
밤이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붉은 침대 위에 누운 소년은 미동 없이 눈만 뜨고서도 그 집의 모든 계단과 난간, 모든 방의 바닥과 복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아무도 서 있지 않을 고요한 계단.
소년은 어떠한 무서운 예감처럼 그곳에 있는 어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소년은 조용한 도서관에서 움직이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촛불의 심지를 돋우었다. 소년은 천천히 붉은 침대로 돌아와 걸터앉았다. 촛불은 미세하게 떨리며 높이 타올랐고, 가장 예민하고 작은 움직임까지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방의 모든 것이 그림처럼 변하면 그곳에는 문득 소년만이 살아 있었다.
그 정확한 순간이 되면 소년은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책상에 앉아 잠옷 차림으로 글을 썼다. 미친 듯이 썼다. 그래도 안에서부터 번져와 소년의 머리통을 빤하게 내려다보는 어둠이 떨어내지지 않았다. 밤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면 소년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소년은 견디다 못해서 늘 피아노 앞으로 고꾸라질 듯 달려갔다. 그리고 피아노를 쳤다. 악보는 보지 않는다. 소년은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피아노를 친다.
그러면 집은 깨어난다.
그러나 소년은 악을 쓰듯 건반을 두드린다.
그러면 하인들과 집사가 발을 끌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문밖으로 희미한 불빛이 스민다.
그러나 소년은 계속해서 건반을 두드린다.
그러면 에드바르가 따뜻한 홍차와 촛불 한 자루와, 잠옷을 들고 문을 연다.
에드바르는 방 곳곳에 밝혀 둔 네다섯 개의 촛불을 모두 끈다. 어둠이 방안을 채운다.
그러나 소년의 숨은 규칙적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소년은 자신이 욕조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은 검고 부드러운 목욕물처럼 소년 주위에 있다. 소년은 자신이 죽어가는 아이가 된 것을 느낀다. 죽음 앞에 선 소년은 차분하고 질서정연하게 가라앉는 사물들을 느낀다.
에드바르는 입속으로 열을 센 다음 손에 들고 온 촛불 한 자루에 불을 붙인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일자 소년은 감은 눈 안으로 그것을 느끼고 웃는다. 욕실의 문이 열리고 빛이 밀려든다. 어머니의 다정스러운 손이 소년의 병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듯 그의 이마에 닿는다.
에드바르는 소년의 손을 잡고 침대로 데려간다.
에드바르는 소년의 잠옷 단추를 차례로 풀고, 소매의 매듭을 풀어내어, 죽음과 절망이 식은땀처럼 묻은 잠옷을 갈아입힌다. 소년은 에드바르가 H에게 묶어주었던 파란 손수건을 생각한다. 소년은 에드바르가 주었던 옷과 역할들을 생각한다.
소년은 이제 단정하고 반듯한 새 잠옷을 입고 있다. 에드바르는 소년을 떠나지 않고 가만히 이불을 토닥여주듯이 소매의 매듭을 고쳐주고 구겨진 옷깃을 펴준다.
소년은 감고 있던 눈을 뜬다. 밝은 머리칼과 길고 둥근 눈매가 그의 앞에 있다. 소년이 웃자 촛불이 천진하게 일렁인다. 소년은 서서 생각한다. 흰 욕조의 곡선보다 단정한 백조 같으며, 촛불처럼 밝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눈썹을 가진 아이. 찻잔 안의 홍차 같은 미소를 짓는, 자신 앞의 아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제 자, 한스. 이젠 괜찮아.⌟
에드바르는 소년을 이불 속에 눕히고 촛불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둔다. 그러면 소년은 잠들 수 있었다. 어둠은 더 이상 소년에게 두려움이 아닌 아름다움이었고, 소년은 그 아름다움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다.
눈보라가 치고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에드바르와 소년은 아주 늦게 잠이 들었다. 그 날은 에드바르가 붉게 상기된 사랑스러운 뺨으로 집에 달려들어온 날이었다. 에드바르는 다 우려나지도 않은 차를 들고 계단을 뛰어올라 소년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에드바르의 얼굴은 보지 않고, 에드바르의 뺨처럼 연한 분홍빛을 띠는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그것이 마치 못 먹을 음식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소년이 도저히 먹지 못하는 훈제된 생선 같은 어떠한 것. 소년은 그 연한 분홍빛 차를 아주 정성스럽게 요리한 훈제된 생선처럼 느끼고 있었다.
익숙하고 작은 집,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접시의 생선을 내려다보다가, 문가에 선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머니다. 이상하게도, 소년의 저녁 식사로 소년이 먹지 못하는 훈제된 생선을 요리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사랑스럽고 다정하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다. 소년은 한 번도 그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높고 빨라서, 소년은 마치 자신이 바라보는 그 모습이 가벼운 바람에 밀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같이 점심 먹기로 했어!⌟
소년은 에드바르의 아름답게 상기된 얼굴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의, 급하게 우린 차를 소년에게 내어주고,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로 다정한 에드바르는 가볍게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에드바르와 소년은 밤새 소년의 방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다. 주로 에드바르가 말하는 쪽이었고, 소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에드바르는 그 아이의 귀엽고 섬세한 눈코입,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칼, 그 아이가 입고 온 연한 분홍빛 드레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가능한 자세히 설명했다.
그 애랑 계속 놀고 싶어, 밤새 놀면 얼마나 재밌을까? 에드바르는 끊임없이 말하면서, 좀 더 어렸을 적 소년과 그랬던 것처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웃었다. 소년은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이불이 어깨까지 다 흘러내릴 때까지 그대로 두었는데, 자주 고개를 숙이고 잠옷의 옷깃을 매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바르는 방문 앞에 서서 소년의 소매 매듭을 고쳐주고 구겨진 부분을 펴주었다.
⌜자, 다 됐다. 이제 자, 한스.⌟
소년이 뒤집어썼던 이불을 쥐고 침대에 기어들어가자 에드바르는 문을 닫아주고는 눈가를 비비며 자신의 방으로 갔다.
창밖에서 바람이 창문을 희미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치고 보름달이 뜬 밤, 붉은 침대 위에 누운 소년은 미동 없이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에드바르는 번뜩 눈을 떴다.
끊겼다가 이어지는 피아노 소리가 어둠을 타고 에드바르의 방까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에드바르는 눈만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요했다. 에드바르는 깨어 있는 것은 그와 소년뿐이라는 것을 피부로 알 수 있었다.
⌜한스.⌟
에드바르가 소년의 방문을 열었을 때 소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지 않았다. 소년은 문 바로 앞에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차는 못 가져왔어.⌟
에드바르는 양초를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다. 방 안은 촛불 하나 없이 어두웠다. 글을 쓰고 있던 게 아니었어? 에드바르는 별일이라는 듯 웃으며 소년을 침대로 이끌어 앉혔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덮은 검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에드바르는 초의 심지를 돋우었다. 소년의 입은 계속해서 잠자코 다물려 있었는데, 눈은 크게 뜨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네, 한스. 에드바르는 단정하고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는 새 잠옷을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에드바르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년이 뒤로 물러났다.
두 아이는 모두 멈춰 섰다.
소년의 눈은 자신이 에드바르를 위협하기라도 한 것처럼 커져 있었고, 에드바르의 눈은 그 위협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처럼 커져 있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창밖의 눈보라 소리도 어쩐 일인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의 방은 마치 그림이 된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선 소년과 에드바르마저도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년의 심장은 귀에서 뛰고 있었고, 그림처럼 굳은 소년의 다리는 주전자처럼 끓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소년은 에드바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소년은 에드바르의 크게 뜬 눈에서 에드바르 안에서도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에드바르 역시도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음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몸이 움직였다. 소년은 에드바르가 침대에 올려둔 잠옷을 집어들어 그에게 떠밀듯이 주었다.
에드바르는 잠옷을 떨어뜨릴까봐 두 팔로 그것을 안았다가, 마치 정신이 든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한스, 이게 뭐야?⌟
소년은 경직된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이었다. 그것은 따뜻한 목욕물보다 기분 좋은 옷이었고, 소년의 가장 잘 쓴 글보다 아름다운 옷이었고, 어둠과 죽음보다 강하고 부드러운 옷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거세게 고개를 젓다가 일그러지듯이 말했다. 네가 입어.
넌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그 옷도 주고 싶지 않잖아. 너는 나를 싫어하잖아.
에드바르는 바싹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년은 점점 몸이 떨리고 있었다. 소년 안에 있는 주전자가 다리 끝까지 끓고 있었고, 소년의 손가락은 건반이라도 치듯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었다.
⌜너는 거짓말쟁이야. 너는 이제 없어. 너는, 연분홍색을 좋아하잖아.⌟
에드바르의 입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소년의 크게 뜬 눈 앞에 에드바르가 서 있었다. 사라진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부드럽고 밝은 머리칼과 백조같이 다정한 곡선의, 찻잔에 든 홍차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아이가. 소년은 걷잡을 수 없이 악을 쓰며 외쳤다. 다른 애의 에드바르가 될 거잖아.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방은 조용했다.
에드바르는 귓가에 얼룩처럼 피아노 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한 음씩 부수듯이 누르는 건반 소리가, 까마귀 울음처럼 뚝뚝 끊어지는 그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