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의 초록

by 유조


리로,

너는 전생을 추적하는 마음처럼

사랑해서 태어난 모든 후회처럼,

가장 강하고 우울한 곳에서

행방을 알 수 없어 가장 확실한 존재이고


리로, 나는 너에게서 떨어져나온 아름다움

열 개의 반지

알함브라의 오렌지와

그리스의 올리브 나무,

파란 고양이와 달

바닷가의 데이지꽃

어느날 올리의 반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까

지난 목요일에 누군가 나를 불러세우고

낯설고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길래 나도 따라했다

그가 내게

미안해, 하지만 네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어,

하고 뒷머리를 쓸었다

리로, 예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듣는 건 짜릿하더라

그의 짧게 다듬은 곱슬머리의 색깔을 가끔 보곤 했거든

그러니까 내가, 여행지에서 산 반지의 오렌지빛 같은

원하는 만큼 - 하지만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환함으로

그의 옷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자 달콤하단 말을 들었다

그는 내게 무언가를 사주었고

ㅡ 작은 데이지꽃이 올라간 실반지를


이제 내 셋째 손가락에는 늘 그 가는 반지가 걸려 있지만 리로, 올리는 내 애인이 아니야

그건 올리에게 애인이 있는 것과는 별개이고

나도 전혀 올리를 애인으로 두고 싶지는 않고, 하지만

왜 여기에서도 외로울 거라고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

내 모든 언어와 일기들이 나를 슬프게 하고, 리로

그럼에도 어떡하지, 너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이태원에는 언덕이 많아

하지만 여전히 코레아노스 라고 적힌 벽돌이 가장 크지

그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어떤 하얀 빛바랜 건물을 하나 보게 되는데

난 그 낡은 흰색 조각들을 보고 그리스를 떠올리고

끔찍해버렸네

내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이상 고통의 빛나는 얼굴에 뺨을 부비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나를 욕할 거야? 리로,

월계동의 차고지에 대해서 들어줄래

일요일의 극장에 내가 있을 거야

네가 왔으면 좋겠지만 이곳은 멀고 먼 곳이니까

까만 햇빛이 서늘한 곳

부끄러움만이 진짜가 되는 곳


차고지로 가는 길에는 자갈과 진흙이 잿빛으로 깔려 있었다

아주 무더운 날이었기 때문에 바지에 튄 얼룩이 금방 말랐고 나는 철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낡은 의자들 위에 있는 향긋한 공기 ㅡ 어떤 식당의 박하 사탕처럼

간혹 벽돌처럼 늘어서 있는 버스들에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내렸다

형근아 왔냐

이름을 불리며 들어오고

지문을 찍고

음주 측정기에 입김을 불어넣고

손에 든 담배를 오른쪽 파란 쓰레기통에 버렸다

준식이

들어와 지문을 찍고 입김을 불고 담배를 던진다

들어오는 누군가마다 반복한다

어 명진아 권석아 병근아 우겸아 지관아 왔냐

그러니까 리로, 연극을 사랑하지 않기로 한 건 잘한 일이었어

혀 아래쪽을 굴리다 마침내 사랑을 정의 내렸었는데

적어두지 않아 오늘은 잊어버렸거든

벗어난다는 건 갇히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인걸

어디에 갇힐지를 잘 정해야 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작년 여름에는 절대 입지 않았던 옷을 꺼내 입는 기분으로 그 반대의 것을 사랑해버리면 믿어버리면 그만


리로, 오늘 내가 입은 옷은

보라색 긴 치마에

동글한 기호가 적힌 하얀 셔츠

그런 옷을 입었는데도

누군가 나에게 레몬 사탕을 주었는데도 (그게 마침 내가 먹다가 며칠 전에 똑 떨어진 똑같은 사탕이었는데도)

그리고 멀리 조그만 식당에서 화려한 컵에 달짝한 음료수를 주문했는데도 그런데도 나는 입안이 써서

너무 써서

리로, 너는 해파리처럼 잘 걷지

젤리빈처럼 알록달록하고 매일

사랑을 하는 나의 리로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오늘 내 보라색 치마 위에는 주황색 책파란색 잉크펜이 있었다는 것

오전 내내

입안이 써서 죽고 싶어지다가도 당신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것

가상의 당신이 나를 지겨워할까 싶으면서도 난 가상의 당신이라고 쓰면서 너무 슬퍼진다는 것

이름과 얼굴

월계동의 차고지

그건 곧 시작일 뿐이라는 걸

서류봉투를 든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그의 검은 안경과 운동화로

극이 시작된다는 걸

매일 어디에서 무엇에서


리로,

더 이상 너의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을 부비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욕을 할까

굳이 평화를 안겨줄까?

젤리빈을 땅에 묻고 온 나를

부드러운 흙의 이불로 눈가를 문지르는 나를

내 모든 언어와 일기들이 슬프게 하고,

사랑해서 태어난 빗방울 같은 모든 얼굴을

울지 못하는 영원한 오전처럼

끔찍해할 때


리로,

갇힌 것처럼

반대편에 - 고개 돌리면 거기 있는 먼 곳처럼

아름다움처럼, 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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