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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이 전쟁터가 되지 않게

실체 없는 것과 싸우지 않기

by 유주씨

오빠가 집을 비운 주말,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식사를 한 뒤 커피를 한 잔 하고 지난달의 가계부를 정리해 본다. 월세도 안 내는데 많이도 썼구나 하면서 그간 못 쓴 한을 푼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번 달에는 조금 줄이는 방향으로 목표해 본다.




날씨가 흐린 날은 자연히 기분도 가라앉는다. 맑은 날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지만 날씨에 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마른 화분의 흙 위에 물을 준다. 건조한 흙에 물이 스미면서 쓰르륵 하는 소리가 날 때가 좋다.

어젯밤부터 모아둔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그리 상쾌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쌓아뒀었나 싶을 만큼 텅 빈 싱크대에 마음도 구름 없는 하늘처럼 청량해진다. 요즘엔 제목도 모르는 재즈를 듣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름도 모르는데 재즈 음악의 제목은 알아서 뭐 하나 싶다. 다시 찾지 않을 건데.



그러다가 내가 가진 물건들을 훑어본다. 화장품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먼저 쓸 것부터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둔다. 뭐 하나 더 바른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X영 세일에 잠시 눈길이 갔다가 가계부 생각에 거뒀다.



어제는 지인과 번화가를 구경하고 끝없는 수다를 떨었지만 오늘은 입에서 말 한마디가 나올 일이 없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대부분 쓸모없는 걱정, 잡념과 추억이라 무시하고 털어버린다. 15년 전에 먹었던 어느 식당의 통통한 계란말이 같이 작고 힘없는 기억이다.



어쩌다 기억이 일으키는 감정에 휩쓸릴 때 실체 없는 것과는 싸우지 않기로 한다. 강물 위에 띄워 보내는 나뭇잎처럼 맘껏 떠나가거라 한다. 석가가 속이 상한 중생에게 뜨거운 주전자를 잡고 있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렇게 나도 그것을 내려놓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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