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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일을 벌인 적이 없는 사람

장사, 투자, 결혼 아무것도 한 게 없네

by 유주씨

성인의 나이로 살아오며 지금껏 나는 일을 제대로 벌인 적이 없다는 걸 느꼈다. 내 나이 30대 중반인데 큰일 없이 살았다니 정말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조로운 고인물이 아닌가.



그동안 주변에선 직장을 다니거나 장사를 벌였다.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가게가 망해서 재취업을 하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했고 누군가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가끔 파혼이나 이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시간이 멈춘 듯 산 모양이다. 나는 직장을 전전하다 겨우 1년 넘게 다니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나 마찬가지다. 긴 세월 동안 부동산을 산 것도, 결혼을 한 것도, 그렇다고 장사나 투자를 해서 대박 친 것도, 망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 나 뭐 했지?



정말로, 나는 한 번도 무슨 일을 제대로 벌인 적이 없었다. 대학원을 가지도, 노량진에서 공시준비를 하지도, 해외취업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빚 없이 집안 돈을 날리지 않고, 또 번 것도 별로 없이 숨죽이고 살아 있었다. (이유는 지난 글들에)



결혼은 무슨, 10년 가까이 연애도 못했다. 간혹 기회가 생겨도 자신이 없어서 거절했다. 내가 똑바로 못 서있는 상태에서 타인을 만나 의지하고 기대게 되면 건강한 관계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회복만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그쪽으론 이미 늦었다 싶어서 노후준비를 하려고 한다.



참 조용히도 살았다. 뭔가를 취미 삼아 열정적으로 배우러 다닌 기억도 먼 옛날 같다. 그래서 어젠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기록했다. 쓰다 보니 뭔가 해볼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건 속으로 거의 불가능이라고 느껴져 가볍게 쇼핑몰 위시리스트에 담는 것처럼 적긴 했지만.



살면서 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건, 위기나 기회를 만든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고인물처럼 생각이 굳고 늘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변화 없이 산 거다. 위기가 있으면 풀어나가고, 기회가 있으면 손끝을 뻗게 되는 진짜 어른의 경험을 덜 해본 것이니 내가 무얼 탓하리. 그래서 이제는 조금 두렵고, 조금 설레는 것을 찾아본다. 끄적끄적 버킷리스트에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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