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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Apr 20. 2024

잡초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서

  시골의 봄은 냄새부터 다르다. 겨울 동안 숨죽여 있던 온갖 생명이 땅속에서 올라와 매일 아침은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다. 늘 같은 풍경의 논, 밭, 강과 산이지만 어제와 오늘, 내일의 색은 다르게 변한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세상은 온통 자연스러운 초록으로 덧칠이 된다.

 가뭄에 내리는 비는 미래를 위한 생명과도 같다. 그러나 이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다. 비가 오고 난 뒤 잡초를 뽑는 시기를 놓치면 땅바닥에 있던 잡초는 사람 키만큼 자란다. 작은 잡초는 손으로 뽑거나 호미로 캐내지만, 키가 높이 자란 잡초는 낫으로 걷어내고 뿌리를 캐내 멀리 던져야 한다. 줄기가 부러져 조금이라도 뿌리가 살아있으면 다음에도 똑같은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 그늘 없는 논, 밭에서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오로지 손으로 잡초를 솎아내는 일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노동의 참맛을 알지 못한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비 오듯 하지만 잡초는 마지막까지 땅속 깊이 있는 뿌리로부터 힘을 쥐어짜 내 뽑히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지키려 애쓴다.

 간혹 예쁜 잡초도 만난다. 쑥이나 민들레, 토끼풀같이 먹을 수도 있고 꽃도 피고 모양도 예뻐서 뽑아버리기 아쉬울 때도 있다. 마당에서 자랐다면 참혹하게 뽑히는 잔혹사를 겪지 않고 잘 자랐을 테지만 논, 밭에 자리를 잡은 잡초에게 자비란 없다. 아무리 예뻐도 잡초는 잡초이다. 예쁜 모습에 현혹되어 늑장을 부렸다가는 고된 노동만 되풀이된다. 자신이 알아서 태어나고 알아서 살아가는 잡초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산다. 밟히면 밟히는 대로 그대로 자란다. 누가 뭐라건 그 자리를 지키며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땅에서 양분을 끌어 올린다. 밟혀 꺾어진 몸을 세우는 대신 삶을 살아내는 데 집중한다. 위로 자라 꺾이는 대신 밟힌 그대로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누운 채로 아픔을 견뎌 낸 후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든다. 간혹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된 길바닥에 뿌리를 내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꽃을 피우고 서 있는 모습은 경이로움을 넘어 슬프기도 하다. 온 힘을 다해 견뎌낸 고난의 시간을 생각하니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다.

 잡초의 씨앗은 환경에 따라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버티며 세상으로 나올 기회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부분의 농작물은 인간에게 더 유용한 음식이 되기 위해 계속된 품질 계량으로 성장과 번식보다는 열매나 씨앗에 집중한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온 잡초는 왕성한 번식력으로 더 크고 높게 자란다. 잡초는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산다. 반드시 씨앗을 남겨 훗날을 도모한다. 인간이 가꾸지 않아도 자라고 유전자를 바꿔서라도 다시 살아난다. 이처럼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세잎의 흔한 토끼풀이 옹골찬 삶의 의지로 잎을 하나 더 만들어내 네잎클로버라는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을 보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이처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내와 끈기가 곧 잡초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대가족 생활을 하며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시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집안의 당연한 살림 밑천으로 잡초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남아선호사상이 깊던 할머니는 오빠와 남동생이 아닌 나를 논두렁에 있는 잡초처럼 자라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양분이 된 것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밖으로 나오면 쉽게 죽지만 온갖 역경을 겪은 잡초는 온실 속에서 더 크고 굵게 자랄 것은 당연하다.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도로 위로 흐르는 빗물 속에도 이름 모를 잡초 씨앗들이 섞여 있을 것 같아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게 된다. 오랜 시간 때를 기다렸다가 비를 만나 세상으로 흘러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곧 흙 속에 자리를 잡고 땅 위로 올라와 잎을 펼칠 것이다. 크고 높게 자라 자신만의 황금기를 보내고 생명이 다할 때 내일을 위한 씨앗을 머금어 세상으로 뱉어낼 것이다. 이처럼 작은 씨앗들이 불굴의 의지로 만들어낼 초록빛 여름은 숭고한 삶의 한 부분이다.




 인생의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지금 잡초 같은 인생이라 홀대하는 말은 이제 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잘 포장된 잡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꼭 잡초처럼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잡초처럼 살아도 빛나지 않을 삶도 없다. 하찮아 보이는 잡초라도 사람 손에 자라면 더는 잡초가 아닌 것처럼 빗속을 흐르는 이름 모를 잡초 씨앗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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