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꿈
보통 나이 먹은 사람들이 모이면 무용담을 말하며 과거를 회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골에서 자라 좀 해맑고 단순하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은 있었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없는 살림에 둘째인 딸이 오빠와 남동생을 제치고 공부를 하고 타지방으로 유학을 가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을 넘어해서는 안될 일이기도 했다.
부모님 허락 없이 몰래 고등학교 원서를 쓰고 연합고사를 보고 면접날이 다가왔다. 비밀로 해주기로 했던 같은 동네 친구가 아빠에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부슬비가 내리는 흙마당에 내던져지는 책과 책가방을 줍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직장을 다니고 월급이란 걸 받고 어린아이에서 내 앞가림을 하는 성인으로 자랐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졸업식을 하고 2주 뒤에 결혼을 한 친구도 있고 보통은 20대 중반에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그때는 그랬다. 여자는 좋은 직장을 다녀도 결혼을 하면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님을 모시는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때 나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남편과 연애를 할 때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그랜져를 사는 것이었고 결혼 후 4년 만에 그랜져를 신차로 뽑았고 그때 남편은 꿈이 사라져 공허함에 매일 술을 퍼마셨다. 현모양처가 무슨 꿈이냐고 코웃음을 쳤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세상을 몰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간 그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경제활동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에게 나를 맞추는 게 당연하다고,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먼저 결혼한 친구도, 옆집 아줌마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스라이팅했다.
현모양처를 꿈꾸면서 수발생활도 시작되었다. 시어머니에서 나에게로 넘어온 수발의 주체는 그대로였고 1년 8개월 동안 '우리 엄마는'이라는 어미를 달고 살았다. '우리 엄마는'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았지만 나 또한 그것이 이상했지만 또 당연스러웠다. 나는 모자란 양처만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동창들 중에는 정말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을 몇 년 다니다가도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하고 곧 임신과 육아로 그냥 아줌마가 되어갔다. 이런 과정들이 너무 당연했다.
나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며 오랜 시간 혼자 지내다 보니 계획 없이는 되는 게 없고 또 경제관념이 비교적 일찍 자리 잡았고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엄마에게 월급의 절반을 보냈지만 그 돈은 흔적도 없고 엄마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힘들게 모은 돈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기억도 하지 못했다. 나는 가계부를 썼기 때문에 그간에 보낸 돈의 액수와 사용처를 물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부모에게 자식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돈이 내 결혼자금이 될 줄 알았다.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했고 엄마를 믿었다. 엄마를 몰랐었고 그때 큰 수업료를 지불하고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젊은 여성의 나이를 금, 은, 동으로 나누고 30살 전에 치워야 한다는 말은 우리 부모님 입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때 내가 결혼을 결심하고 내 옆에 있던 남자랑 결혼을 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고 모든 것이 나와 달라 어쩌면 신선하고 다른 영역의 사람이라 흥미가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돈을 벌어오고 그 남자를 섬기고 챙기는 것은 여자의 몫이라고 법으로 정해 놓은 건 아니었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고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갔다.
현모양처라는 꿈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모양처가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때랑 크게 변한 것도 없다. 사실 돈이 많으면 남편, 아이들, 시댁 수발들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종종 있는 집 며느리가 된 언니들을 보면 직장 다니는 나보다 더 대우받고 백화점도 세일 때는 사람 많다고 가지도 않는데 부럽기도 하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부러워한다. 각자 가는 길이 다르고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각자의 삶이 틀린 것은 아니니.
항상 모자라 노력해도 칭찬 없이 살아온 시간이 너무 안타깝다. 어쩌면 그런 것들에 너무 길들여져 나 자신조차도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내가 나의 내면아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고등학교 원서를 썼다고 흙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내동댕이 쳐진 책과 가방을 줍던 중학교 3학년 아이였다. 빗속에서 떨면서도 흙 묻은 책을 씻어 말리고 다음날 아무 일 없다는 듯 학교에 갔다. 그렇게 빗속에서 떨고 있던 아이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곧 졸업을 한다. 이제 나의 내면아이도 성인이다. 나이 50에 3년 만에 중학교 3학년 내면아이를 대학교 4학년까지 키워냈다. 이 정도면 현모의 근처라도 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나의 자식이 아니니 현모는 아닌 듯도 하지만 경력단절을 뛰어넘어 어렵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사실 현모양처가 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조금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열망인 것 같다. 70살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도 나는 현모양처가 꿈일 듯싶다. 죽기 전에 현모양처가 한 번이라도 되어 보고 싶다. 그게 뭐길래 자꾸 그렇게 살라 했는지 궁금하다. 현모양처도 꿈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이제 나는 현모도 안되고 양처는 더더욱 되지 못하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차피 안될 거 꿈이라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