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했더니 생활비를 끊었다.

시급 6,470원에 11개월 경력을 샀다.

by 신의손

이력서를 20장을 넘게 넣고 면접도 수차례 봤지만 모두 떨어지고 마지막 면접본 곳에서 연락이 왔다. 겨우 경력이 다시 이어졌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11개월로 종전에 2개월 계약직을 합치면 1년이 넘는 기간으로 경력자가 될 수 있었다. 집과의 거리도 가까웠다. 지하철로 2코스였고 걸으면 20분 정도 걸렸다. 길치인 나에게 직진만 하면 되는 출근길도 퍽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결혼 후 나의 두 번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직장생활이 그렇듯 월급은 공짜로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월급을 한 달 욕값이라고 할까. 거의 모든 계약직이 시급을 받고 일을 한다. 나도 그랬다. 시급 6,470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 돈이 내 세상을 지키게 했다. 점심은 사 먹어야 하고 가끔 타는 지하철과 얼굴을 내놓고 일하니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옷과 신발, 화장품 구입비까지 생각하면 사실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래도 좋았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음식도 시켜주고 아이들 옷이나 필요한 것들을 남편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는 자꾸 눈치가 보여 내 양말 한 짝도 사지 못했다. 한 달에 한번 월급날이면 날 위한 작은 선물도 사고 하찮지만 열심히 직장인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나를 응원했다.


출근시간은 9시였고 퇴근은 6시였다.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꼬박 8시간을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2차전을 시작하는 워킹맘이 되어갔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가끔은 출장도 가고 야근도 하고 회식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 매달 10일이면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다. 내가 일하던 곳은 젊은 정규직들이 포진된 상태에서 계약직이 1년 단위로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그해에는 늘 뽑던 20대 계약직 대신 파격적으로 아줌마 7명이 입사하게 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보이지 않는 벽은 물론 있었고 정규직의 지시를 받아 일을 해야 했고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일처리를 깔끔하게 한다 치더라도 결정권은 아예 없었다. 그냥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가끔 회식이라도 하려면 며칠 전부터 온갖 비위를 맞추고 당일에는 아이들과 남편의 일정에 피해가 가지 않게 식사며 빨래며 청소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같이 돈벌지만 집안일은 다 내 차지였다. 그래도 그 작지만 소중한 월급을 모으며 적금도 붓고 남편 눈치 안 보고 돈을 쓰니 좋았다. 시간에 맞춰진 식사와 집안의 쾌적함이 덜해진 나의 직장생활을 남편은 싫어했다. 그의 마음속을 다 헤아릴 순 없었지만 명분은 아이들의 돌봄에 내 직장생활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언제 그만둘 거냐고 하는 것까지는 참았지만 얼마나 번다고 아이들을 내 팽개치고 밖으로 도는 매정한 엄마로 만들 때면 내가 정말 저 사람과 평생을 생각하며 결혼을 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계약직으로 입사했으니 퇴사일은 정해져 있지만 남편은 계속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여자로 살아가길 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너무나 나를 사랑해서 노력대비 월급도 적은데 욕들으며 돈 버는 것이 안타까워 돌려 말한 것일 것이나 후자는 절대 아니니 자신의 불편함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단절된 경력을 이어 붙였고 직장인으로 조직에서 살아갈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발인의 삶으로는 살 수 없다 말했다. 반발은 예상보다 컸다. 처음엔 50만 원이 그다음 달엔 100만이 줄었다. 얼마뒤 가계부와 카드명세서를 달라고 하더니 매달 나가는 대출이자만 내 통장에 입금되었다. 가끔 가는 시댁에서도 무언의 압박이 들어왔고 남편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기존의 수발생활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것을 가장 하기 쉬운 돈으로 가장 치사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얻은 일자리인데 여기서 물러나면 그동안 자격증을 따려고 잠 못 자며 공부한 시간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던 그 노력들이 다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견디고 참아내야만 했다. 새벽 5시가 되지 않을 때부터 일어나 밥을 하고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며 나의 도리를 해냈지만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설거지를 끝낼 때까지 남편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시어머니께 어떻게 말을 했는지 아침밥도 차려주지 않는 돈 번다고 유세 떠는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를 괴롭혔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방어를 했다. 그렇게 견디며 11개월 계약직 사회생활이 끝이 났다. 다음 해 사업비가 나오면 재계약을 하자고 구두협의를 하고 아이들의 겨울방학을 온몸으로 챙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방학은 엄마들에게는 전쟁터이니 몸도 마음도 준비가 필요했다. 그동안 소홀했던 베이킹도 하고 반찬도 만들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엄마의 출근에 익숙한 아이들은 출근하지 않는 엄마가 어색한지 출근 언제 하냐고 하루에 한 번은 꼭 물어보는데 은근히 출근을 하고 돈 버는 엄마가 좋은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생활비는 복구되었지만 나의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복구되지 못한 채 2017년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인터넷 쇼핑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내 무료함을 달래줄 보이스피싱전화라고 생각하고 받았었다. 이것이 또 다른 인생의 서막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이전 11화슬픔에도 유효기간이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