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뜨거웠던 여름. 그 여름을 함께 하기 위해 5월 5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그냥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내 반쪽이 있으니 든든했다. 도망칠 타이밍은 여러 번 있었는데 내가 몰랐다.
남편은 가끔 술을 먹고 언덕 위의 아파트까지 나를 업고 숨을 헉헉대며 달리기를 해서 반상회 때면 아줌마들이 신혼이라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막 준공검사가 끝나 입주하기 시작한 아파트 화단에서 사람 키만 한 천리향을 꺾어 현관에 끌고 오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나무판자도 떼지 않았고 CCTV도 설치 전이어서 다행이지 그날 나는 아파서 입구에서부터 천리향 흔적을 찾아 비질을 했었다. 아파트 아줌마들은 로맨틱하다고 박수를 쳤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한 들꽃이라며 한 다발 꽃을 꺾어 오기도 했다. 다음날 경비아저씨가 아파트 화단의 꽃이 다 없어졌다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나는 애써 모른척해야 했다. 솜씨발휘를 한다며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다 넣고 떡볶이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목구멍이 받아주질 않았다. 군대에서 배웠다며 양손에 걸래를 대고 쪼그려 앉아 뜀뛰기 하듯 청소도 해주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짧은 6개월의 신혼이 지나가고 있었다.
결혼 전 자유롭게 음주가무를 하던 친구들을 끊을 수 없었는지남편은 주먹에 쥔 모래알처럼 조금씩 나에게서 조금씩 빠져나가 총각시절로 돌아가 듣도 보도 못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나가면 전화가 되지 않았고 그런 날이면 밤을 새우고 거실에 앉아 있었던 적도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다시는 밤을 새우지 않는다 다짐했지만 내공이 부족했던 나는 남편이 늦는 날에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밤을 새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남편이 아침 해와 동시에 집으로 들어오면 안도감과 배신감으로 온몸이 떨렸다. 주말이면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주중에는 출근을 해야 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꽐라가 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말없이 꿀물을 타주고 방에 들어와 누웠다.나에게 남편이 들어오지 않았는데 잠이 오냐는 술주정을 하는 남편이 밉기도 했지만나는 눈물만 삼켰다. 내가 한 결혼이고 내가 선택한 남자니 내 눈을 뽑고 내 손을 자르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했고 멍청했다.
술을 먹고 온 날이면 술국을 한 냄비 끓여도 모자랐다. 이때 나는 북엇국의 달인이 되었다. 남편은 술국으로는 모자란 지 얼음물, 꿀물을 계속 찾았다. 첫 잔은 정성으로 타다 주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방문을 닫고 만다. 약국심부름부터 온갖 수발이 시작된다. 너무 힘들고 술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서 심부름을 시켰다. 나중엔 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나 휴대폰 배터리를 빼버렸다. 그러고 나니 집 전화가 울렸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남편의 심부름 전화였다. 전화기 코드를 뽑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었다. 나는 냄새에 민감하고 남편이 술을 먹고 온 날이면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제발생사확인만이라도 하자고 큰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거라도 하자고 울며 애원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웃기지만 아직도 이 사람과 산다. 바보 같지만 지금은 이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 과거엔 남편에게 맞춰주고 눈치 보며 살았다면 지금은 내 마음대로 나는 막산다. 막산다는 것이 애매한 단어이기는 하나 명절에 호텔 가서 혼자 3박 4일 지낸다거나 시부모님 생신이나 남편 생일도 잊어버리면 챙기지 않는다. 집안일은 하지만 목숨 걸지 않는다.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운동을 하고 내 몸을 위해 시간을 쓴다. 그래서 결혼초와는 달리 막살고 있다. 그냥 막살자 싶게 막살아도 40 넘고 50 돼 가면 주변에서 막살게 놔두지 않는다. 아이들도 조금만 늦어도 전화가 온다. 핑계는 밥이지만 빨리 들어오라는 잔소리인 것을 안다. 어쩌면 이게 사는 맛이기도 한 것 같은데 이미 늦은 것 같다. 생사확인도 필요 없어진 지금의 내 마음은 녹슬고 삭아내리고 말았다.
뒤집어 생각하면 생사확인차 어딘가에서 전화가 온다면 그건 죽음이나 그와 맞먹는 큰 사건이 있을 테니 지금은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인 채 막살아 보려 한다. 사실 인생 살아보니 별거 없다. 하루하루 살아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