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의손 Nov 24. 2023

겨울빨래

나일론 양말

 은영이 강가에서 작은 손으로 돌덩이를 들어 꽝꽝 언 얼음을 깨고 있었다. 아무리 내려쳐도 얼음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빨리 얼음을 깨서 빨래해야 했다. 빨래터가 있었지만, 겨울이라 물이 말랐다. 우물물도 말랐고 집집이 수도가 들어왔지만, 은영의 집에는 아직 펌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겨울 펌프는 자주 얼어 한낮이 되어서도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가 없다. 그날도 빨래를 한대야 이고 강가로 나왔다. 바람 부는 강가는 아무도 없었다. 은영이 내려치는 돌이 얼음 위로 구르는 소리뿐이었다.

 겨우 얼음에 구멍을 뚫어 그 속에 든 얼음을 손으로 건져 냈다. 하얀 은영의 손이 빨갛게 변했다. 대야로 강물을 퍼 가져온 빨래를 담갔다. 빨래는 물을 먹지 않고 둥둥 떴다. 은영이 언 손으로 빨래를 눌러 억지로 물을 먹였다. 빨래가 버둥거리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은영의 뒷모습같이 처량했다. 대야에는 물을 먹어 늘어진 하얀 나일론 양말이 때가 타 시커멓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얀 나일론 양말은 미끄러워서 방에서 신으면 미끄럼틀을 타는 것 같이 재미가 있었지만, 신발을 벗는 학교에 신고 가면 빨래를 하기가 어려웠다. 면양말처럼 삶았다가는 금세 줄어들기 때문에 삶지도 못한다. 은영은 이런 나일론 양말을 그것도 하얀 나일론 양말을 빨아오라고 시킨 엄마가 미웠다. 하지만 내일 학교에 신고 갈 양말이 없어서 얼른 빨아서 가야 했다. 작은 손으로 빨래판을 할만한 돌을 찾아 얼음구멍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양말 두 짝을 돌 위에 올리고 빨랫비누 칠을 하기 시작했다. 양말을 조물조물하니 이내 하얀 거품이 났다. 회색빛 땟물이 나기 시작했다. 양말을 들어 강물에 흔들었다. 하얀 비눗물이 강물을 따라 얼음 아래로 지나갔다. 그렇게 비누칠하고 헹구기를 반복하니 시커멓던 나일론 양말이 하얗게 변했다. 발바닥만은 노랗게 물이 들어 빠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비누칠을 다시 했지만, 발바닥의 노란 물은 변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곧 해가 질 것 같았다. 겨우 깨 놓은 얼음구멍이 다시 얼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얼음구멍에 조금씩 살얼음이 붙고 있었다. 손이 시리고 감각이 없었지만 빨리 손을 움직여야 했다. 아직 하지 못한 빨래가 더 많았다. 작은 은영의 손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빨래를 마치자 해도 떨어졌다. 해가 없는 강가의 찬 바람이 은영을 휘감았다. 갑자기 무서워진 은영이 빨래 대야를 머리에 이고 쫓기듯 뛰었다. 누군가 뒤에서 은영의 빨래 대야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무서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뛰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들어서는 은영을 보고 은영 엄마가 부엌에서 뛰어나오며 은영의 등짝을 때렸다.

 " 이놈의 가시나 겁도 없이 해가 지면 집에 와야지 혼자 강에 있다가 누가 잡아가면 우짤라 켄노"

 은영이 머리에 이고 있던 빨래 대야를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 아니 빨래 다 하기 전까지는 집에 오지 마라매. 빨래 해오라케서 해왔더만 와 머라카는데 와 때리는데"

 방으로 들어간 은영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무서움에 얼마나 뛰었는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강바람에 얼었던 얼굴과 양손이 녹아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은영은 서러움에 눈물을 훔치며 다시는 집안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다. 은영이 잠깐 졸다가 밖에서 들리는 식구들 소리에 잠이 깼다. 배가 고팠지만 조금 전 엄마와의 일로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그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웃으며 은영을 불렀다.

 "은영아 밥 묵자. 니 좋아하는 김치 볶아놨다. 얼렁 가자."

 엄마가 은영의 벌건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은영이 미소 지으며 엄마를 따라나섰다. 밥상 앞에 앉은 은영이 강에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개선장군처럼 은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저녁 부엌 가마솥 뚜껑 위에는 하얀 양말 눈이 내렸다. 은영이 얼음을 깨서 빨아온 나일론 양말이 하얀 눈처럼 솥뚜껑 위에서 마르고 있었다.

 다음 장날 엄마가 사 온 나일론 양말을 손과 발에 끼우고 은영이 동생들과 장판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그런 은영을 보며 은영 엄마가 말했다.

 "은영이 니 인자 양말 빨아도 되겠제? 흰색 아이다 아이가"

강가에서 얼음을 깨던 그날처럼 은영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빨갛게 타올랐다. 미끄럼을 타는 동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해져 갔다.

 긴 겨울이 지나고 아지랑이 피는 봄이 왔다. 강가의 얼음은 봄바람에 녹아 아쉬운 인사를 하며 떠내려갔다. 다시 빨래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얼음을 깨던 당찬 은영의 튼 손도 조금은 자라 있었다. 빨래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큰딸 은영의 마음에도 봄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전 04화 여름날 비밀하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