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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Nov 14. 2023

여름날 비밀하나

밥짓기

 은영이 부엌 쌀뒤주 앞에서 까치발을 하고 서서 쌀을 퍼 내고 있었다. 작은 키 때문에 허리까지 뒤주 속에 넣어야 했다. 뒤주 속에서 버둥대며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박바가지로 세 번 쌀을 퍼내 쌀대야에 담았다.

수돗가로 나와 키만 한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넣고 펌프질을 시작했다. 은영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금세 숨이 찼다. 펌프 손잡이를 잡고 쉬지 않고 움직이자 펌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돗가 빨간 드므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쌀대야에 물을 붓고 쌀을 씻는 은영의 손이 바쁘다.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쌀을 네 번 씻어 헹구고 부엌 가마솥에 안쳐야 했다. 곧 해가지고 식구들이 집으로 올 것이라 마음이 급했다. 쌀대야를 들어 쌀뜨물을 소죽통에 따르다가 쌀대야에 있던 쌀이 소죽통 쏠리며 하얀 쌀알들이 소죽통으로 마당으로 뿌려졌다. 뽀얀 싸리꽃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것 같았다. 은영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은영은 수돗가에 뿌려진 쌀을 주워 담고 소죽통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퍼내기 시작했다. 온갖 음식물들이 섞여있는 소죽통은 냄새도 나고 파리떼가 들러붙어 있어 평소라면 근처에 가지도 않을 테지만 지금은 더럽고 냄새나는 소죽통보다 엄마의 꾸중이 더 무서웠다.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밥을 해야 했다. 물을 퍼낸 소죽통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손으로 건져 내고 소죽통 안에 있던 쌀을 모아 바가지에 담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등 뒤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은영의 몸이 굳었다.

 "은영이 니 거서 뭐 하노? 소죽통에 뭐 빠졌나?"

골목을 지나던 이장아저씨였다. 당황한 은영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장아저씨는 별일 아닌 듯하던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장아저씨가 사라지자 은영은 다시 소죽통에 머리를 박고 쌀알을 줍기 시작했다. 냄새도 파리떼도 은영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주운 쌀알들을 모아 여러 번 씻었다. 혹여 쌀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퉁퉁 불은 손등으로 밥물을 잡고 아궁이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얼마 후 가마솥뚜껑에서 하얀 밥물이 흘러내렸다. 아궁이 불을 빨리 빼야 했다. 흘린 쌀이 많아 누룽지를 만들었다가는 식구들의 밥이 모자랄 것 같았다. 아궁이 속에서 나온 재에 마른김을 구웠다. 반찬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벌겋게 타고 있는 아궁이 속 장작 때문인지 은영의 마음도 타들어가고 있었다.

 일을 나갔던 식구들이 돌아왔고 은영은 쌀을 쏟은 것을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은영은 엄마와 저녁상을 차렸다. 누가 봐도 오늘 저녁밥은 윤기가 흐르고 되지도 질지도 않은 잘된 밥이었다. 밥상 앞에 앉은 은영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은영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엄마가 은영에게 물었다.

 "은영이 니 쌀 불맀다가 했나?"

 "어? 솥에 앉칫다가 불을 늦게 땠는데 그라면 안 되나?"

 쌀에서 소죽통 냄새가 날까 걱정하던 은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꾸중이 아니라 칭찬이라는 걸 알고 긴장이 풀린 은영은 그제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크게 밥을 떠 김에 싸 먹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마당은 모깃불 연기로 가득 찼다. 은영은 형제들과 함께 덕석에 누워 별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퉁퉁 불은 손에서 소죽통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은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죽통에서 건져낸 하얀 쌀알 같은 별들이 여름 밤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깊어가는 여름밤 8살 은영의 비밀 하나가 모깃불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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