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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Oct 18. 2023

어깨동무

동생과 술찌게미

 할머니께서 아침부터 가마솥에 불린 쌀을 쪄 고두밥을 지어 나무채반에 펼쳐 두었다. 그 고두밥을 은영과 동생이 할머니 몰래 집어먹었다. 등 뒤에서 할머니의 고함에 놀라 두 남매는 대문 밖으로 도망쳤다.     

 할머니께서 식힌 고두밥과 며칠 전 만들어 놓은 누룩을 손으로 잘 비벼 섞어 술독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솔잎을 씻어 얹었다. 이불로 술독을 덮은 다음 아랫목에 잘 모셔두었다가 쌀알이 떠오르고 보글보글 거품이 생기기 시작하면 며칠 후 시큼한 막걸리 향이 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막걸리를 할머니께서 마루에 앉아 고운체에 걸러 막걸리 항아리에 담았다. 외정 시절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도 몰래 술을 담가 할아버지께 한 잔씩 약주로 드렸다고 했다. 한 번은 막내 고모가 관에서 조사가 나왔다며 술독을 숨기라고 했지만,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 벌금도 내고 이틀만 있었으면 막걸리가 되었을 술독도 뺏겨 분하고 아까워서 우셨다고 한다. 3살짜리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절대 흘려들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 그렇게 책에서나 보던 외정 때 순사들이 나오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막걸리는 다 걸러졌고 놋쇠 대야에는 술지게미만 남았다. 뽀얗게 걸러진 막걸리를 두 남매는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술지게미는 소에게 주는데 그날은 할머니께서 어쩐 일인지 사카린을 타 마루에 두었다. 배고픈 은영과 동생은 먹지 말라는 할머니의 당부의 말을 잊은 채 술지게미에 슬쩍 손가락을 찔러 맛을 봤다. 이내 부엌에서 숟가락을 가져와 술지게미를 퍼먹기 시작했다. 반 이상을 퍼먹고 나서야 정신이 든 은영은 덜컥 겁이 났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골목에서 깨를 털고 있던 할머니는 숟가락으로 술지게미를 퍼먹던 두 아이를 보더니 놀라 털던 깨 대를 놓지도 못하고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은영은 할머니를 피해 도망쳤다. 두 남매 뒤를 따라오는 할머니는 마치 무서운 도깨비 같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금세 얼굴은 달아오르고 땀이 비 오듯 했다. 안도감에 숨을 고르고 걷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은영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누가 은영의 등을 떠밀었다. 은영의 이마는 금세 커다란 혹이 생겼다. 은영은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생만 옆에 서서 놀란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또 누군가 등을 밀고 있었다. 은영의 이마에서 혹이 계속 자라났다. 나중에는 길바닥도, 전봇대도 은영에게 달려와 사정없이 이마와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옆에 있는 동생도 혼자 엎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은영은 동생이 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은영과 동생은 네발로 기어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둘은 어느새 어깨동무하고 서로를 의지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갔다. 두 남매는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낮술을 먹었다며 지나가면서 혀를 찼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집 마당에 들어선 아이들을 할머니는 마루에 끌어다 놓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잠이 들어 할머니의 잔소리는 마당을 돌며 메아리가 되었다.     

 저녁이 되어 밥상 앞에 앉은 은영의 이마는 빨갛게 혹이 여러 개 나 있었고 동생의 양 볼은 할퀸 자국이나 빨갛게 부어 있었다. 엄마는 동생과 술지게미를 퍼먹고 온 동네를 돌아다녀서 소문이 났다고 은영의 등짝을 때렸다. 언제나 꾸지람은 은영의 몫이지만 은영은 말이 없었다. 은영이 김칫국 사발을 들어마셔 보지만 속은 쓰리고 머리도 계속 흔들리고 지끈거렸다. 또 술지게미를 먹을 거냐고 호통치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혼이 나간 은영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동생도 혼이 날까 무서워 숟가락만 쥐고 숨을 참고 있었다.     


 다음날 은영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무도 없는데 계속 길바닥에 내 이마를 때리고 전봇대가 나한테 왔어. 누가 나를 밀고 도망쳤는 갑다’

은영의 말을 듣던 엄마는 은영의 등짝을 때리며 눈을 흘겼다.

‘가시나! 한 번만 더 술지게미 묵고 동생까지 데리고 싸돌아다니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둘 끼다’

은영은 그날 누가 자신을 밀고 도망쳤는지 궁금해 입이 근질거렸지만, 또 등짝을 맞을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마루에 앉아 길바닥이 들이받은 부어오른 이마만 만질 뿐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골목을 지나며 은영을 불렀다. 은영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손으로 가리며 대문을 나섰다. 아이들이 이마를 가린 은영의 손을 치우며 짱구 이마라고 놀리며 웃었다. 좁은 골목이 금세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파도를 탔다.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 위로 시원한 가을 햇살이 바람을 타고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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