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탐미 : 쨍하고 찡한 레드의 자존심:

퇴폐(Decadence)에서 엘레강스까지, 꽃무릇과 카민의 유혹

by 유수연
물안개 언덕너머
잊혀진 신들의 꽃바늘 있어
기다림은 혈관을 뚫고
빨갛게 더 빨갛게
...


최근 몇 시즌 동안 런웨이는 마치 도솔천 기슭에 핀 꽃무릇처럼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피치 퍼즈(Peach Fuzz)의 부드러움에 질린 디자이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장 원초적이고 치명적인 '레드'를 소환했기 때문이다.


레드는 참으로 묘한 색이다.

눈이 시리도록 쨍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런웨이를 장악하다가도,

어느 순간 가녀린 꽃무릇처럼 텅 빈 한구석을 찡하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숨어버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레드의 그 간극은 '가장 고독한 탐미'라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는 그 쨍한 화려함은 사실, 자신의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는 처절함 일지도 모른다.

잎과 꽃이 평생 만나지 못하는 꽃무릇의 운명처럼,

레드라는 컬러 안에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서늘한 고독이 공존한다.


우리가 레드를 입는 순간 느끼는 시선들, 그리고 그 화려한 고립을 즐기는 당당함.

쨍하고 찡한 감정의 파동이야말로 레드가 패션을 통해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녀린 몸뚱이로 솟대 위에서 핏빛 눈물을 쏟아내는 꽃무릇의 '애처로운 순리'와 닮아 있다.


가장 뜨겁게 자신을 증명하다가도,

계절이 바뀌면 단 한 번도 붉은 적 없었던 듯, 푸른 잎으로 돌아가는 꽃무릇의 단호함처럼.


패션에서 레드를 입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압도하는 자존심인 동시에, 가장 치열한 순간 스스로를 지워내고 다음 계절(Persona)을 준비하는 '트랜스(Trans)'의 미학이다.


패션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이번 시즌 런웨이를 지배한 '공식적인' 레드는 페라리 레드구찌 안코라 레드였다.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본 레드는 조금 더 세밀한 감정을 품고 있다.


단순한 도발을 넘어, 절제된 실루엣으로 완성되는 붉고 우아한 엘레강스로의 진화라는 것이다.


2026 FW 김서룡 서울패션위크

때론 가장 붉은 것이 가장 고독하다.

스스로를 다 태우고 나서야 비로소 푸른 잎을 내어주는 꽃무릇처럼,
우리의 레드 또한 뜨거운 열정 뒤에 숨겨진 '비움'의 미학을 닮아 있다.



"단 한 번도 붉은 적 없었던 듯
지우고 사라지리니"
.....

— 유수연, <꽃무릇, 지다> 中



퇴폐적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그 지독한 엘레강스를 이해하는 이만이 진정한 레드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꽃무릇처럼, 오늘 당신의 레드가 누군가의 눈에는 쨍하게, 누군가의 가슴에는 찡하게 남기를 바랍니다.


올 시즌 당신의 옷장에 걸린 레드는, 혹시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뜨거운 고백' 아닐까요?


<올시즌 주목받는 레드 >

카민(Carmine): 깊고 진한 붉은색이 주는 권위와 퇴폐미.

구찌 안코라 & 메를로(Merlot): 벨벳 소재와 만났을 때 가장 성숙하고 섹시한 엘레강스를 완성하는 짙은 와인빛 레드

페라리 레드 & 크림슨(Crimson): 혈관을 뚫고 나오는 듯한 원초적 생명력과 비에 젖은 꽃잎 같은 섬세함을 동시에 지닌 모순적인 매력의 레드.

스칼렛(Scarlet): 물안개를 뚫고 나오는 듯한 선명한 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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