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 안감의 미학

해방의 시스루부터 배려의 레이어링까지

by 유수연
아무도 그립지 않은, 그저 그렇게 시시한 날
창밖은 망망대해
하얗게 드리워진 농무사이로
숨기지 못한 외로움을 세어본다
....
안개의 품속에서
제한몸 다 숨긴 채 떨고 있는 작은 새

누구나 가슴속에는 늘 떨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나를 감싸고 있는 차가운 외피를 한 꺼풀 벗겨내면 드러나는, 시인의 살결처럼 연약한 본질처럼 말이다.


흔히 안개는 차갑고 무거운 존재로 비친다. 그러나, 실은 작은 새를 숨겨주고 보호하기 위해 제 몸을 부풀려 지극한 사랑을 하는 중이라 생각해 본다.


패션으로 치면, 겉은 투박하고 단단한 '보호복'이지만 그 안감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실크로 마감된 마르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의 코트와 같다고나 할까?


마르지엘라가 옷의 구조를 뒤집어 안감을 겉으로 드러내 본질을 질문했듯, 안개 낀 창가에서 마음의 안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손 안의 찻잔은 이토록 따스한데
유리창 사이로
맺혔다 사라지는 숨결
전할 수 없는 애처로움이여


해방의 시스루에서 배려의 레이어링까지


시의 행간 사이로 비치는 안개의 온기는 패션의 역사 속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겹겹이 몸을 감싸던 시절,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의 등장은 1968년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부터 시작된다.


이때의 시스루는 단순히 섹시함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여성을 옥죄던 코르셋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투명함은 곧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정신은 훗날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를 만나며 정점에 달한다. 마치 안개가 형체를 지우듯 옷의 전형적인 구조를 뒤집어 안감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미학은 화려한 겉모습(Decoration)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의 깊은 배려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어느새
창가를 가르는 한 줌 햇살
떨리는 바람결 사이로
조금씩 투명해지는 눈물 자욱


이런 보이지 않는 배려는 요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로고 대신 소재의 질감(Texture)을 겹쳐 입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실크 위에 캐시미어를, 그 위에 다시 투명한 오간자를 겹쳐 입는 식으로...

그것은 마치 안개의 보호를 받는 작은 새처럼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안갯속을 걷는 법 : 레이어링의 배려]


이런 '배려의 레이어링'이야말로 패션이 저렴한 소비재로 전락한 오늘날,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가치.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사랑의 본질'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말간 안개 한 자락씩을 품고 산다. 그 안개를 억지로 걷어내려 하기보다, 겹겹이 안감을 덧대듯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패션의 온기일지도 모른다.

- 해방의 시스루 : 감추는 것이 미덕이었던 안감을 밖으로 꺼내는 용기.

- 배려의 레이어링: 겹겹이 입는 행위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격리하는 벽이 아니라, 나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가장 부드러운 안식처.

때로는 선명하게 나를 보여주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마르지엘라의 옷에 새긴 네 줄의 하얀 스티치처럼,

보일 듯 말 듯한 그 흔적들은 때로는 가장 강렬한 자아의 선언이 되기도 하듯이 말이다.


안갯속에 몸을 섞고 투명한 안감을 덧대어 입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지워진 이름 뒤에 남은 말간 살결의 흔들림


내가 입은 옷의 안감처럼

가만히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결국 나를 증명하는 수단이기에 앞서, 나를 정화하는 과정이다.

......
보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라며
눈물 가득 품고 사라진 착하고 고운 안개

: 유수연, <보이지 않아도> 中 발췌


[작가의 말] 보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듯, 보이는 것만이 패션의 전부는 아니다.


보일 듯 말 듯 우리를 보호하는 겹겹의 온기, 바로 레이어링의 미학이다. 겹겹이 쌓은 시폰의 레이어드는 안개가 만들어낸 가장 부드러운 벽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느낌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사랑을 입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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