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산책

by 숨비소리

서랍을 정리하다가 당첨됐지만 잊고 넣어둔 즉석복권 2만6천 원어치를 발견했다.


"엄마랑 복권 바꾸러 가자."


오늘도 학교에 가지 않은 딸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현관으로 끌고 나갔다.


다리 한쪽에 몸뚱이 하나쯤은 들어갈 법한 널찍한 회색 체육복 바지, 흰 면티, 검은 바람막이 점퍼를 걸친 딸아이는 무채색의 화신 그 자체다. 중2병을 세차게 앓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춘기 아이들의 옷차림이 저러할까.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그때는 온통 검정과 하양, 회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만큼은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무채색일까. 빨강, 노랑, 핑크. 색깔은 많은데 말이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바지통이 눈에 거슬린다. 저런 게 유행이라니, 싫다. 하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2025년을 살아가지만 딸아이가 살아가는 2025년과 내가 살아가는 2025년은 엄연히 다르니까.


"이거 뭐지? 타볼래."


현관문을 나서려던 딸아이가 동생의 킥보드에 관심을 보이더니 그걸 가지고 나선다. 저걸 사놓은지가 언젠데 이제서야 그게 눈에 들어오나보다.

두 발 킥보드는 타본 적이 없어서 탈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딸아이는 곧잘 킥보드를 탄다. 저 킥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생한 아들이 떠올랐다. 운동신경은 확실히 딸아이 쪽이 낫다.


하천 옆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오랜만이다. 작년 가을쯤이 마지막이었나? 추위를 핑계로 도통 나오지 않았다. 못 보던 사이, 하천가에는 봄을 알리는 꽃들이 많이 폈다. 붉은 토끼풀은 내 무릎까지 자라났고 푸른 수레국화도 꽃망울을 터트렸다. 금계국은 이제 꽃망울이 맺힌 정도였지만 곧 그 노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며칠만 지나면 온 천지가 노란 금계국으로 뒤덮이겠지. 군데군데 새하얀 계란꽃과 샛노란 애기똥풀의 모습도 보였다. 민들레와 제비꽃은 키 큰 꽃들에 가려진 건지 철이 지난 건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드문 드문 유채꽃이 자라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비둘기 몇 마리가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라도 줏어먹고 있는 건지 땅을 쪼아대며 길 위를 걸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딸아이가 비둘기를 향해 냅다 달렸다. 놀란 비둘기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딸아이가 씨익 웃었다. 비둘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오랜만에 아이가 웃는 모습을 봐서 그저 즐거운 나는, 이기적인 엄마일 뿐이다.


미세먼지인지 하늘이 뿌옇다. 아. 오랜만의 외출인데 별로다. 봄날의 산책은 모름지기 맑고 깨끗한 공기와 청명한 하늘, 밝은 햇빛과 함께해야 하거늘. 게다가 덥다. 언제 이렇게 더워진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면 서늘하니 추웠는데. 도저히 걸을 맛이 나지 않는다.


"...덥다, 그지? 걸어가기 힘들겠는데?"

"응."

"돌아갈까?"

"응."


평소에도 죽이 잘 맞는 편이지만 이럴 때는 더하다. 쓸데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다 없어진다고 투덜대면서. 나는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살이 걱정되는 건지, 나이가 들어 단 게 싫어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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