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깊이 있는 글을 쓴다.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심도 있는 생각들을 이끌어 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나는 늘 감탄한다.
나의 글은 얕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우울하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깊은 생각은 항상 절망과 연결되었다.
나의 생각은 늘 어두웠고, 내 생각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 깊은 심해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울과 회의에 물들기 싫었다.
그건 지옥의 색이다.
손목에 그어진 칼자국과 거기서 새어 나오는 피로 물든 고통의 색깔.
나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피했다.
생각이 이어질 때면 고개를 휘젓거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이제는 생각을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
'나는 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감탄하는가?'
라는 질문에도
'멋있게 보이고 싶은가 보지.'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물론 옛날처럼 절망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내 삶이 그런 우울한 시간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는 걸 살아가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관은 잘 변하지 않는다.
생각과 감정을 툭 잘라버리고 무의식 속에 파묻은 다음 무시해 버리는 것.
그건 지나왔던 내 삶이 내게 남긴 상흔과도 같은 버릇이다.
내 인생이 그 정도로 힘들었던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많다. 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 내내 '내가 정말로 불우했던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의심하며 내게 슬퍼하고 우울해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곤 했다.
유부남의 사생아로 태어나 남의 집에 입양될 뻔했고, 배다른 형제들과 살아야 했으며, 가난과 부부싸움과 폭력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말이다.
내겐 아직도, 다섯 살 쯤엔가 아빠의 본처에게 가기로 결정된 다음 마지막으로 엄마와 가족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결국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비 오던 그 여름날,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가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나에게, 엄마는 '너 정도면 양호하다.'라고 말한다.
하긴, 엄마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마는 내게 늘 아래를 보라고 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생각하라며.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다는 걸까.
남의 불행을 디디고 서서 견디라는 거였을까.
억지로 하는 정신승리.
나는 그게 싫다.
남의 불행을 보며 싸구려 우월감에 젖어드는 것.
엄마는 늘 남을 평가하는 습관이 있다.
외적으로 부족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 엄마의 말투 속에는 조잡한 우월감이 묻어났다.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같은 하나님의 자녀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불행했던 삶이 엄마에게 남긴 흔적일 거다.
남의 불행을 밟지 않고서는 도저히 서있을 수 없었던 거겠지.
엄마는, 삶이 엄마의 마음에 남긴 흉터를 껴안은 채 절뚝거리며 살아왔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삶의 방식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엄마 또한 아픈 삶을 살았고, 그랬기에 어딘가 삐뚤어진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나도 분명 마음의 어딘가가 망가져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마음이 아픈 아이를 업은 채 살아간다.
내 마음도 잘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서투르긴 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고 아프고 탈진을 해도 아이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 말해주고 싶다.
"도망치지 않았잖아. 그걸로 충분해."
오은영 박사님이 본다면 나는 굉장히 부족한 엄마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도 나를 응원해 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야 내 모든 것이, 내 모든 인생이 내 아이의 마음이 아프게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