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는 날이다.
부랴부랴 토스트를 만들어 아침을 해먹인 다음 병원으로 출발을 한다.
늘 누나에게 조수석을 뺏기는 아들이지만 이 시간만은 마음껏 조수석에 앉는다.
차에 타자마자 아들이 조잘조잘 수다를 떤다.
아들은 말이 굉장히 많은 편이라 아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그런데 우울증 약을 먹어서인지 이제는 그게 힘들지 않다.
오히려 나도 함께 떠들고 있다.
누굴 닮아 저리 말이 많나 싶었는데 나를 닮은 거였다.
아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아이의 마음이 보인다.
누나는 자기를 갈구고 아빠는 안 놀아주고 엄마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겨난다.
마음이 여려 모든 걸 수용하지만 마음속에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던 걸까.
그런 걱정에 둘러싸인 채 병원에 도착한다.
한 달 사이에 키는 1.5cm 이상 컸고 체중은 줄었다.
오늘은 성조숙증 주사와 함께 피검사, 성장판 검사가 있는 날이다.
옛날이라면 울었을 텐데 요즘은 울지 않는다.
"엄마, 나는 잘 우는 편이야? 누나는 안 울던데."
병원에 오는 길에 아들이 내게 물었다.
확실히 잘 우는 편이긴 하다.
"응, 좀 그렇지. 그런데 그건 네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때 그 감정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그런 거야. 울 때마다 아빠가 뭐라 하지?"
"응."
고지식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편은 아들이 울 때마다 혼을 낸다.
사실 남편은 우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울 때도 남편은 대체 내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근데 안 우는 것보단 우는 게 나아."
아들이 말했다.
"맞아.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어지지"
다행히 일일이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는 않나 보다.
사람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주사를 맞고 검사를 하는 일은 금세 끝났다.
병원은 아이들로 가득하다.
성조숙증 혹은 성장치료 혹은 그 둘 다를 위해 방문한 아이들이다.
아들은 둘 다 치료하는 중이다.
성조숙증도 있는 데다가 성장판도 남들보다 2년 반 정도 빨리 닫히고 있어 성장주사도 맞는다.
딸아이도 성장판이 2년 반정도 빨리 닫히는 바람에 성장치료를 했는데 아들도 그렇다.
분명 집안 누군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일 테지.
그래도 선뜻 성장치료를 결심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벌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단양 다누리 아쿠아리움 얘기가 나왔다.
물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아들이 예전부터 늘 가고 싶어 하던 곳이다.
"아빠랑 누나는 놔두고 엄마랑만 갈래."
아빠랑 누나는 자기가 물고기 사진을 찍는 동안 기다려 주지 않는단다.
목표지향적인 남편과 딸아이는 방탈출 하듯 아쿠아리움의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간다.
그에 비해 둘째와 나는 함께 간 사람들이 답답해할 만큼 수족관에 들붙어 있는다.
몇 십 분이고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있을 수 있다.
아들은 그런 성향이 나를 닮았다.
"그럼 오랜만에 엄마랑 둘이서 데이트할까?"
늘 아픈 누나를 위해 양보하고 참았던 아들이다.
하루 정도는 아들만을 위해 움직이고, 아들과만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엄마, 내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검은색도. 검은색도 보이지 않는 건 어떤 상태일까?"
느닷없이 묻는다.
"글쎄....."
아들은 몽상가 기질이 있다.
그래서 가끔 뜬금없지만 철학적이라고 할 만한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아예 아무런 인식도 못 하지 않을까? 자기 세상이, 내가 보던 세상이 갑자기 사라지는 거지."
하지만 아들은 그 말을 이해하기엔 아직 어리다.
사실 나도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불을 끄면 갑자기 빛이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지는 걸까.
내가 보고 느끼고 살아가던 나의 세상, 나의 우주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내 우주가 나와 함께 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니.
괜히 나까지 철학적이 된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딸아이를 위해 복숭아를 깎고 있다.
남편이 부엌에 있는 모습이 굉장히 낯설다.
"복숭아 깎아달래. 근데 이렇게 많이 먹어?"
싱크대 한편에 불닭과 왕뚜껑 용기가 쌓여있다.
점심은 컵라면으로 해결했나 보다.
남편이 복숭아를 깎아 아빠방에 있는 딸아이에게 가져다준다.
요즘 들어 딸아이는 부쩍 아빠 곁에 붙어 앉아 아빠에게 장난을 건다.
선을 넘으면 화가 폭발하는 성격의 남편인지라 괜히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남편은 성가셔하면서도 잘 버틴다.
딸아이는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원하는 건 꼭 얻어내고야 만다.
물론 그건 고쳐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빠와 함께 노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아마 그래서 남편도 크게 화를 내지 못하는 거겠지.
아들도 아빠방으로 들어간다.
아빠방에 있는 침대 겸 소파에 누워서 누나와 함께 깔깔 거린다.
누나는 자기를 갈구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막상 집에 오면 누나부터 찾는다.
"아유, 이것들아~ 너네 방에 좀 가~"
남편이 툴툴 거린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방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보통 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까?'
나는 일반적이 가정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무엇이 평범하고 무엇이 특별한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딸아이와 아빠가 장난을 치고, 누나와 동생이 같이 놀다가 웃다가 싸우고, 엄마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 풍경은 보통보다는 조금 더 행복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집안이 그렇게 들썩였는데도... 행복한 순간이 생기는구나.'
딸아이의 우울증, 자해, 자살시도, 정신과입원, 나의 휴직...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 모든 일들이 밀려든 게 불과 4개월 전인데 어느덧 나는 일상에서 행복을 본다.
남편이, 아이들이, 이 일상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큰 괴로움이 살짝 물러난 지금, 나는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과 평범한 일상의 귀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 곧 첫째를 보컬 학원에 데려다줄 시간이다.
오늘은 둘째, 남편도 함께 가서 기다렸다가 딸아이가 마치고 나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멕시코 요리 전문점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오기로 했다.
'가족이 함께'
난 요즘 그 말이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