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by 숨비소리

월요일, 학교에 간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사실 학교에 안 들어갔어. 못 들어갔어. 너무 우울해서 큰 도로에서 차에 뛰어들까 생각하다가 엄마 생각나서, 엄마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덤덤하면서도 긴장한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두드린다.


"너 지금 어디야?"

"하천 건너는 다리."

"그럼 얼른 집에 와. 알았지?"

"응."


결국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자해와 자살시도가 존재했던 처음으로.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이는 지금 학교에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의 아이에게는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목표를 수정했다.

교문은 무조건 통과해야 하지만 아이가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갔다 오기.

출결 문제와 유급처리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담임선생님과 의논해야 한다.


왜 약의 용량을 늘렸는데도 나아지지 않을까.


'안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계속 자극에 노출되는 게 문제인가?'


현실적인 이유 때문 에라도 가야 하는 학교는 사실 아이가 불안을 느끼는 가장 큰, 어쩌면 유일한 원인이다.

오늘은 마침 상담이 있는 날이니 상담선생님과 의논해 봐야겠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를 내려놓고 차를 돌리지 않는다.

아이는 교문을 통과해 주차장까지만 갔다가 돌아왔다.

그게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보다.

내 기준이 아닌 아이 기준에서의 최선.

내 눈에 부족해 보인다고 몰아세우지는 말아야지.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상담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후 학업중단 숙려제에 대해 알아본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아이가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판단조차 불가능하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만 않으면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가끔은 아이가 우울증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14살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다.

어쩌면 도로에 뛰어들고 싶었다는 말도 핑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믿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손해보다 믿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손해가 더 크다.

나는 아이의 생명을 담보로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아이의 상태부터 설명한다.

그리고 나의 뜻을 선생님께 전달한다.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의논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다.


"죄송합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늘 죄송하다고 말한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학생이 반에 있을 때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어머니께서 죄송하다 하실 때마다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해지니까 그만 미안해하셔도 됩니다. 가정에서 아이에게 신경도 많이 쓰시고 잘 돌봐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한 걸요."


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위로한다.

나는 잘 해내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내가 이랬더라면, 내가 저랬더라면 아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시달리는 요즘, 한 마디 말이 나를 수렁에서 끌어올린다.

사람들의 위로에 의지하며 오늘 하루도 살아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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