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시작-롤링페이퍼
최근 음료업계의 대세는 '빼기'다.
제로슈거.
논알콜.
설탕맛으로 먹던 음료에서 설탕을 빼고
알콜 수혈을 위해 먹던 술에서 알콜을 뺀다.
설탕 없는 탄산음료와 알콜 없는 알콜이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의문을 가졌던 나는,
요즘 대세를 따르고 있다.
밤 늦게 탄산을 마시면서도
설탕을 덜 먹었다는 이유로,
낮부터 홈술을 하면서도
알콜 없는 맥주맛 탄산을 먹었다는 이유로, 나는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해방감과 부채감을 덜 수 있었다.
설탕과 알콜을 덜어냈다는 이유로.
실직 겸 퇴사 후.
나는 쉬는 사람 겸 백수가 되었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365일 내내 미루던 집안 정리를 시작한 것이다.
갈퀴로 변한 내 손에 가장 먼저 걸린 곳은 책상과 서랍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앉아 세상의 모든 정보를 훑어보던 곳.
아직도 모바일 신청을 하지 못해 우편으로 날아오는 고지서가 쌓인 곳.
읽지도 않는 책과 쓰지도 않는 볼펜이 뒹구는 곳.
그곳부터 갈퀴로 긁어내듯 정리하기로 했다.
이왕이면 눈에 보이는 책상 위부터 치웠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기어코 서랍을 열고 말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것이다.
그 안에는 고대 유물과 희귀품들이 쌓여 있었다.
언젠가, 농사를 짓는 어떤 사람이
갈퀴질을 하다 신석기 시대 유물을 발견해서
창고에 보관해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문화재청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어쩌면 나의 서랍에 든 물건들 가운데에도
문화재청에 신고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며
먼지를 살살 털어내보았다.
서랍 안에는 평범한 사람의 서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이어리와 사진, 편지와 성적표가 들어있었다.
매번 정리할 때마다 몇 개씩 버렸지만 여전히 수북히 남은 것들.
하나 하나 고이 어루만지며 추억과의 재회를 하려 했으나
다행히
추억의 고대 유물 아래에 깔린 롤링페이퍼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다행히
롤링페이퍼는 한 장씩이니까 추억 소환도 길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앞두고 우리 반 교실 벽면에는
종이로 된 일력이 걸려 있었다.
수능 디데이에 맞춰 한 장씩 달력을 뜯기 위해.
그리고 뜯어낸 일력의 날짜와 같은 번호를 가진 친구에게
롤링페이퍼를 썼다. 뜯어낸 일력을 편지지 삼아서.
나는 16번이었다.
서랍에 든 롤링페이퍼에 적힌 날짜 '16'을 보고 알았다.
롤링페이퍼에는 색색의 펜으로 써내려간
짧은 메시지들이 있었다.
마지막엔 메시지를 남긴 친구의 이름을 적혀 있었다.
몇몇은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고
더러는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친구들과
아련하게 이름과 얼굴이 매치되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읽고 나니
고등학교 3학년의 나는, 그런 아이였다.
알아서 잘 하는.
옆에 있으면 즐거운.
울컥, 할 만도 했지만 나는 울컥,하는 대신
확신의 긍정을 담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주 크게.
지금도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였다.
알아서 잘 하는.
옆에 있으면 즐거운.
일기장이나 메신저 프로필에 쓴 적은 없지만 그것은 나의 인생 모토였다.
혼자서도 잘 하고,
함께 있으면 대부분 즐겁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
알아서, 재미나게 살아가는 것.
과연 실직 후에도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나에게
고3 시절 친구들이 돌리고 돌려 작성한 롤링페이퍼는
큰 응원과 확신을 주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으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