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직 이야기 8.

썩 마음에 들었던 나의 퇴사 날

by 늘날생각해

남편이 나에게 꽃을 선물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남편에게 처음 꽃선물을 받은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0000년 5월 21일.

그날은 성년의 날이었고

나는 그날 부로 성년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현 남편은

나에게 장미꽃 스무 송이를 선물했다.

얼굴을 꽃다발에 푹 담그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꽃가루 알레르기가 없어

마음껏 꽃에 코를 박고 꽃향기를 맡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양껏 드러낼 수 있었다.


장미 한 송이를 선물받은 적도 있었다.

남자친구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땀에 절은 모습으로 뒷짐을 지고 나타나서는

뒷짐을 풀어 오른손에 있던 장미 한 송이를 나에게 주었다.

지하철로 우리 집까지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장미 한 송이 들고 수줍게 이동했을 남자친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안 그래도 손에 뭐라도 쥐는 걸 싫어해서

가방도 없이 다니는 사람인데

장미를 들고 지하철을 타다니.

이런 게 사랑이구나, 싶어 감동했더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꽃은 우리 집 근처에서 샀다고 하여

감동이 조금 반감 되었던 기억도 난다.



나도 남자친구에게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한 적이 있다.

남자친구 생일날.

퇴근 시간에 맞춰 마포역으로 가서

선물로 준비한 셔츠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이 좋은 걸 나만 받을 수 있나. 너도 받아야지.

놀림 조로 건넨 건 아니었지만

남자친구는 사뭇 진지하게 나를 의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여자도 남자에게 꽃 선물을 할 수 있다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꿈꿨던 거 같기도 하고

남자라고 꽃 선물 받기 싫을쏘냐?

역지사지 배려의 아이콘을 꿈꿨던 것도 같다.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구)남친 (현)남편은

결혼기념일에 맞춰 회사로 꽃바구니를 보낸 적도 있고

2월 중순에서 말일 쯤,

프리지아 두 단과 봄을 한꺼번에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 남편이 나에게 준 실직 선물은

장미 두 송이와 카네이션 한 송이가

안개꽃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적당한 크기의 꽃이었다.



사실 남편의 계획은 이랬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하기 위해 택배로 꽃을 시켰고

내가 마지막 퇴근길에 올라 집에 도착하기 전에

꽃다발을, 동봉된 꽃병과 앞면만 훤히 비치는 종이가방에 넣어

짜자잔- 하려고 했다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 집에 동시에 도착했고

집 앞에 놓인 상자를 발견하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둘러메고 집에 들어와

뜯어도 되지?

말보다 먼저 칼을 들고 언박싱을 하고 말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상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사실이라

어머? 어머! 오오! 오오? 에에? 를 연발하며

이쁘다, 소리를 열 번쯤 했다.


나의 성향을 잘 아는 남편의 선물은

퍽 마음에 들었다.

담백하고 적당해서 좋았다.

지나온 나의 과거를 치하하는 것도 아닌

앞으로의 날들은 축복하는 것도 아닌

현재의 내가 꽃을 보며 기뻐하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마음을 주고받았다.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어설프고 습관적인 위로를 하지 않는 남편이 있어

어쩌면 가장 울컥해야 할 퇴사 당일의 저녁에도

옆구리가 허전하지 않았고

이유 없이 신나는 감정선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수고했다. 고생했다.

톡으로 마음을 전한 부모님과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명언 같은 말과 보족세트를 선물한 언니,

아무래도 나의 실직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 남동생의 연락 없음,

나의 상황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하는 어머님,

그동안 못 해준 게 많아 미안하다는 손편지를 써준 동료1과

다시 만날 테니 긴 말 않겠다며 한라봉을 선물한 동료까지.

모두 각자의 스타일대로 나를 위로해주었기에

나는 그걸로 충분했다.


서운함도 아쉬움도 한 톨 남지 않은

완벽하고 성대한 위로 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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