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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에 대한 소고

모두의 삶은 다른 가치를 가지므로

by toki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매진하는 우리는 그에 비해 짧은 시간에 하는 모든 것들의 행복감으로

내일의 시간에 매진할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시원한 맥주와 치킨을,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과의 수다를 떠는 시간들 말이다.

이제는 지겨운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소확행' 같은 것들이 실제로 굉장한 힘을 갖는 것처럼.


그런데 어느샌가 일이라는 단어로 가둬버린 그 시간에 가질 행복감은 고됨에 정신이 나가서

언젠가 내가 이 일을 해야지 선택한 순간은 잊혀진게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히 그 사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모두는 고민했고 그 결과 생겨난 단어가 '워라밸'이었다.

내 20대는 워라밸 따위는 전혀 모르는 일들을 해왔고 (워라밸이라는 단어도 없었지만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을거다.) 30대 중반을 넘기는 지금까지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워라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워라밸은 칼퇴라는 공식이 상징처럼 등장했고 그 외에도 휴일이나 급한 일이 생겨 연락을 취할 때면 여지없이 후배 워라밸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분명히 칼퇴는 중요하고 휴일이나 퇴근 후 개인적인 시간을 침해할 권리는 선배라는 위치를 포함한 회사, 타인에게 없다.


그러나 그 '정도'나 '상황'이라는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게 워라밸이라고 느껴버렸다. 그러니 벌써 '젊은 꼰대'가 되어 버린건 아닐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칼퇴가 자기 권리라면 맡은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자기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이 시간이라면 주어진 시간 안에서 책임을 다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나에게 워라밸이 중요하지 않다고 후배에게도 강요하는 꼰대같은 소리만 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워라밸이란 내가 알던 그런게 아니었구나'

'나는 굉장히 워라밸을 잘 지키고 살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애초에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생겨난건 일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균형을 찾고 싶은 대상이 격렬하게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 쳤다는 것을.


매일 야근하고 밤새고 열흘 넘게 집에도 못가고 사무실 바퀴 달린 의자 두개를 붙여 쪽잠을 자던 20대를 떠올리며 라떼를 마시던 생각을 했으니 진짜 꼰대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것, 포인트를 제대로 잘못 짚은 것이 바로 '나의 선택'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다.


바퀴가 계속 굴러가는 통에 자세를 잡으면 다시 굴러가고 다시 잡으면 미끄러지는 의자에서 잘 때도

난 행복했다.

물론 잠을 못자서 매일 퀭 했지만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잠을 자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안쓰러웠는지

"요 앞에 포장마차나 갈까?" 라고 말하는 선배의 한마디에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다.


소주잔을 부딪히며 그날 있었던 다른 팀 선배를 씹어대고 지난 촬영 때 그 아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너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거야"라고 말해주는 선배가 있어서 행복했다.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즐겨찾는 LP바에 가서 듣고 싶은 음악을 실컷 듣고

매달 피같은 연차를 모아뒀다가 해외 락페스티벌 여행을 가기도 했다.

퇴근 후 집에서 보고 싶은 일본 드라마를 틀어놓고 혼술도 즐겼고

휴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을 사서 동네를 걷기도 했다.


이게 나에게는 '워라밸'이었다.

일상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삶 전체가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태도로 일을 중심에 놓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라이프스타일을 요즘은 '워라블'이라고 한다더라.


워라밸이든 워라블이든

어쨌든 일과 삶의 균형, 조화를 통해 내 삶 전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왜 나쁘고 누가 틀렸을까.


기본과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개중에 몇 개의 케이스를 두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의 가치를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고 모두의 삶은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매일, 매시간 책임을 기반으로 한 선택을 하며 사는 우리 모두에게

초심이나 배부른 소리하지 말라고 다그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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