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오이를 만나다.
말과 멍과 유령이 내 판타지 속의 인물들이라면
당근과 오이는 현실에서 만나 또 한 번 판타지를 심어준 친구들이다.
스물셋에 대학에 갔다. 그 나이에 대학에 가게 된 그간의 일이 좀 있지만 생략한다. '생략'이라고 써 놓고는 또 걸려하는 마음이 든다. 마구 설명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만 정말 생략하기로 한다. 길어질 것이기에.
말과 멍과 유령이 없는 학교라니. 게다가 여대였다. 차라리 남녀공학이면 연애라도 할 텐데 말이다.
대학 갔다고 축하해 주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말과 멍과 유령은 사실 그동안 많이도 들어왔던 그들의 대학생활 이야기를 다시 새로운 이야기 마냥 떠들어 댔고 난 지겨워 담배만 피워댔다.
얘들아. 나이 23살에 대학 가는 게 뭐 그리 두렵고 설레겠니.
뭘 그렇게 자꾸 나한테 낭만을 심어주고 사람을 심어주려고 해.
맨날 학교에서 술이나 처먹는 것들이.
저 말을 시원스럽게 하고는 다음날 난 처음 학교에 가 당근과 오이를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아주 소중한 인연을 말이다.
또 실명을 말할 수도 없고 별명이 실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누가 알겠느냐마는) 아무 상관없는 당근과 오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한다.
그들과의 대학생활이 촘촘한 밤하늘의 별과 같은 낭만스런 날들은 아니었지만 아니, 이렇게 나와 잘 맞는 인간이 있다니, 이 세상에는 어쩌면 당근과 오이같이 나와 맞는, 그리고 심지어 (당근과 오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내가 맞춰줄 수 있는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나이 23에 사회성과 사교성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난 그들을 매우 귀여워했다.
자주 사주지는 못했지만 내가 사주는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보기 좋고 고마웠으며, 특히 공부를 열심히 하던 당근이 학점을 잘 받아 장학금을 받거나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나갈 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대견스러워했다. 오이는 종종 나를 세상에서 제일 개인주의 적인 언니라고 부르면서도 언니는 참 좋은 사람이며 세상에서 제일 웃기고 세상에서 제일 이소라 노래를 잘 부른다고 했다. 85년생 어린 친구답게 감탄사를 연발했으며 과장을 하며 말하기는 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 누군들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당근과 오이뿐만이 아니라 난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곱게 빗은 생머리에 한 손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토트백을 들고 다른 손에는 영시나 영 소설책을 들고 다니며 조용조용히 말을 했고 정말 웃을 때 손을 가리고 웃기도 했다
미팅을 하는 날이면 유난히도 들뜬 아이들이 틈나는 대로, 아직은 서툴어 보이는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며 많이도 웃고 다녔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묻기 어려웠을 텐데도 예의가 있어 항상 나에게 같이 미팅을 나가자고 하였다. 너무나 나가고 싶었으나 무언가 양심 비슷한 것이 항상 나의 발목을 잡고 그건 아니다 라고 소리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애들이 네다섯 살 먹은 누나가 나오면 참 좋아하겠다 그치.
사실 내 속마음은 '언니 나갈게. 너네 나가서 나한테 반말해도 돼. 욕도 물론. 언니는 열린 사람이니까. 4년 내내 반말해도 언니는 상관없단다.'이러고 싶었지만. 아. 이렇게 사람은 또 성장하는구나. 나 연하 참 좋아하는데. 잘 참았어라며 홀로 자신을 다독이곤 했다.
연애를 시작한 누군가는 술을 먹다 울었고 그런 새끼는 안 만나는 게 낫다며, 언니처럼 많이 만나봐야 보는 눈도 생기는 법이고 더 좋은 눈을 가지기 위해서 언니는 앞으로도 많이 만날 예정이니 너도 어서 정리하고 새 남자를 만나라고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는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진짜요 언니? 헤어질까요? 언니?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혀가 꼬여 언니. 언니. 하는 아이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나이 많은 언니를 아이들은 여기저기 잘도 끼워 주었고 그럴 때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거절하지 않고(사실 고마워했어야 했으나) 자주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또 여행을 갔다.
아이들은 모두 밝았고, 공손하기 까지 하여 서로에게 예의를 잘 지켰으며
새침해 보일 때는 있으나 얄미운 짓을 하지는 않았다.
어리다고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나보다 더 남을 배려했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 아이들은.
말과 멍과 유령과 만나 이제는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떠들며 요새 애들이 특히 우리 학교 애들이 얼마나 예쁘고 똑똑한지 말해 주었다. 말과 멍과 유령은 이렇게까지 대학 생활을 밝게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흐뭇해했고 특히 당근과 오이에게 고마워했다. 가끔은 말,멍,유령, 당근, 오이 이렇게 내 판타지의 주인공들이 다 같이 모여 놀기도 했다. 말과 멍과 유령은 당근과 오이에게 나랑 지내는 것이 힘들지 않냐며 물었고 당근과 오이는 가끔 언니가 너무 개인적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좋아해 섭섭할 때가 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오이가 말했다.
언니는 그냥 그런 사람 같아요. 같이 잘 놀다가도 도서관 가서 혼자 책을 읽을 시간이 필요하고 노래방도 혼자 다녀요. 학기가 끝나고 방학만 하면 우리랑은 잠깐 끊고는 아예 만나지도 않아요. 맨날 봐서 한 달 두 달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아. 이 언니 너무 웃겨 정말.
당근과 오이가 까르르 웃자 말과 멍과 유령은 저것들도 특이하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당근과 오이를 보았다.
얘들아 내가 데려온 애들이야. 보통 아닌 애들이라고.
역시 이번에도 나의 인복은 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