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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Apr 21. 2016

<해어화>, 박흥식 감독

* <해어화>, <협녀, 칼의 기억>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욕망과 원망으로 얼룩진 칼이 뒤섞였다. 검의 끝에 붉은 피가 흥건히 뿌렸다. 가슴에서 펄떡이던 그리움이 비로소 갈앉았다. 제 어미와 아비의 몸에 칼을 찔러 넣고 홍이는 오열했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눈물과 핏물이 함께 침잠하였다.

 영화 <해어화>에서 윤우(유연석)가 남긴 편지를 품에 안고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는 소율(한효주)의 모습에 박흥식 감독의 전작,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의 홍이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울음의 끝에 두 인물에게 남은 것은 오직 평생을 살아도 지우지 못할 깊은 회한뿐. 나는 소율과 홍이가 가여웠다. 

"막 따낸 찻잎에선 아무런 향도 나지 않지요. 하지만 찻잎은 짓이기고 짓이겨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 강하고 좋은 향을 냅니다." - <협녀, 칼의 기억> 설랑의 말
 “막 따낸 찻잎에선 아무런 향도 나지 않지요. 하지만 찻잎은 짓이기고 짓이겨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 강하고 좋은 향을 냅니다.” - <협녀, 칼의 기억> 설랑의 말

 영화 <협녀>를 볼 당시 받아 적었던 대사다. 전도연이 흘리듯 대사를 뱉는 장면을 돌리고 또 돌려 보았다. 말에서 존재에 대한 서글픈 연민이 풍겼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다.’ 연민의 뜻은 이러하다. 내가 연민의 생생한 감정을 느낀 것은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나는 내가 가여웠다. 그것이 마땅한 감정인지, 미숙한 감정인지 성숙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모든 것이 가엽게 느껴졌다. 존재한다는 것은 가여운 것이다, 결론을 내렸다. 존재한다는 것이 가여운 까닭은 생의 순간마다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생(生)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한 치 앞이라도 다만 알 수 있다면 존재는 가엾지 않아도 괜찮다.

"오라버니. 나는요. 정가가 좋아요.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만든 노래 꼭 부르고 싶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조선의 마음이 되고 싶어요." - <해어화> 소율의 말
"난 이 시대의 아리랑을 만들 거다. 조선의 마음이 부르고 불러서 비로소 완성되는 노래!" - <해어화> 윤우의 말
"선생님이 그러셨어. 내 목소리가, 조선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 <해어화> 연희의 말

 <해어화>는 존재에 대한 하염없는 연민의 감정을 ‘조선의 마음’으로 풀어낸다. 소율, 연희, 윤우 모두 ‘조선의 마음’을 바랐지만, 바람의 의미는 제각기 다른 것이었다. 소율에게 조선의 마음은 윤우를 향한 연심이었다. 연희는 조선의 마음을 부름으로써 제 안의 가시를 털어내기를 바랐다. 윤우는, 난세를 위로코자 했다. 조선의 마음이 하나가 아니었으니, 그들의 갈 길도 모두 달랐다.

 소율과 연희, 윤우의 선택을 ‘배신’이나 ‘복수’로 말할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조선의 마음’을 좇았을 뿐이다. 다만 그 마음들이 엇갈리게 될 것을 미리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어리석음의 대가는 가혹했다. 사랑을 잃고, 우정을 잃고, 꿈을 잃는 것이 그 대가였다. 그러니 어찌 가엽지 않을 수 있나.

      

"헛된 나를 잊는 대신 부디 너만은 잃지 않기를." - <해어화> 윤우의 말

 한참을 엎디어 운 뒤에 홍이는, 소율은 어찌 살았을까. 영화는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 이전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변함없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후회를 남기고 눈물을 흘렸겠지. 하지만 그러한 삶일지라도 아름답다. 종내에는 살아지고 말 모든 헛된 것을 위해 하룻강아지처럼 뛰어드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협녀>가 그랬듯, <해어화> 역시 그저 멜로극이나 복수극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홀로 메마른 들판 위에 
기댈 곳 하나 없이 외로이 서있네
못다핀 꽃한송이 기나긴 어둠속에
태양은 뜨지 않아 힘겨운 하루하루
눈물만 흐르네     
눈물아 비 되어라
서글픈 세월 맘을 적셔다오
아아 침묵아 이제 천둥이 되어
숨죽인 저 대지를 흔들어다오
설움아 너는 폭풍이 되어
눈감은 하늘을 모두 잠깨워다오     
비는 기약없는 비는
가여운 이 땅을 기어이 버리는가
눈감은 하늘이여 메마른 폐허 위에
핏물보다 더 붉은 눈물이 흐르네
서러운 눈물이여     
눈물아 비 되어라
서글픈 세월 맘을 적셔다오
아아 침묵아 이제 천둥이 되어
숨죽인 저 대지를 흔들어다오" - <조선의 마음> 가사


* 본문 사진 출처는 네이버 영화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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