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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Feb 23. 2016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여기, 우리는 왜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는가에 대해 답하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 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도의 대승 불교 학자 나가르주나의 말이다.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나가르주나의 말은, 다시 말해, 관계가 부재하는 자리는 반드시 공(空)하다는 말일 것이다.
  공하다. 공하였다. 극장을 홀로 나서며 나는 빈곤한 마음을 다시금 느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참으로 좋지 않다. 나뭇가지로 말랑한 심장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안으로 떨어지는 느낌이기도 하다.

  영화가 조금만 덜 충만했다면, 나의 정신이 그토록 침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기어코 그 사랑이란 것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 그곳에 있었다. 영화 <캐롤>.

  대개 멜로 영화에도 어떠한 사건이 있게 마련이다. 기억상실증, 쫓기는 자들, 비밀스러운 임무, 여행 등. 그를 통해, 감동과 흥미를 배가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그런 설정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환상으로 치부된다. 현실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적은 탓이다.

  영화 <캐롤>은 캐롤과 테레즈, 두 인물의 감정 변화를 응시하는 데 치중한다. 물론 일련의 사건이 존재하고 벌어지며, 인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사건은 결코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사건들은 인물의 일부가 된다. 나름의 사정이 없는 개인이 어디에 있나.

  제각기 상처를 입거나 사연이 있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때로 두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특별할 것은 없다. 누구와 사랑에 빠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일 뿐이다.

  사랑이 시작된 후 매일 아침과 밤에 나를 지배하던 설렘과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두려움과 초조함이 된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그 또는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지는 않을까. 이 사랑이, 변하지는 않을까....... 충만함과 빈곤함,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게 되며 어떤 때는 나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좇아간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하게 되는 경험이다. 사랑을 하다 보면,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도 진심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반대로,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사랑을 느끼게 되는 순간도 있다. 백 마디의 말과 스킨십이 아니라 시선으로 전해지는 사랑. <캐롤>은 시선의 밀도를 아는 영화다.

  하여, 솔로인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몹시도 공(空)하였더랬다. 별 수 없이, 좋은 멜로 영화를 본 대가인 셈 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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