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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Feb 23. 2016

<비포 선라이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청춘이란 뭘까.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말하고 싶다. 아아, 생각해보고 싶다. ‘청춘’이라는 간결하고 가벼운 낱말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는 무수하다. 어떤 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라 하고, 꿈이 있다면 청춘이라 하고, 구체적인 나이를 말하는 이도 있다. 

  부질없는 의미 하나를 덧씌우는 것 같아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결국 청춘이란 ‘지나간 때’가 아닐까. 지나가 버린, 떠나 버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리운, 혹은 그립지 않은 시간들.

청춘이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니까. (사진 출처: 제목, 본문 모두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 <Before Sunrise>는 청춘을 노래하는 영화다. 그렇게 수없이 이 영화를 보았는데도, 언제고 볼 때면 마음이 충동질한다. 발바닥이 간질거리고 심장은 철없이 몇 배속으로 뜀박질을 한다. 멋대로 떠나, 우연히 누군갈 만나, 취한 듯 사랑에 빠지고 싶어진다. 무료한 일상으로 점철된 나의 소중한 현재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영화처럼,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마음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귓가에는 관현악이 울려 퍼질 테다. 언제까지나 청춘이고만 싶은 설렘.

  안타까운 일이다. 청춘은 자신의 눈을 가린 채로 빛을 발하는 성질을 지녔다. 제 자신이 청춘인지는 미처 모르는 채로 미련스레 지나가 버리고 만다. 혹시 그대, 영화를 보며 옛 어린 날의 무모하고 지질하며 오로지 열정으로만 가득했던 연애 혹은 사랑을 떠올렸다면.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어처구니가 없지만,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도 배시시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면, 청춘에 다름 아니다. 

  마치 청춘의 그것처럼, 영화의 서사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성과 순간성이다. 뜻하지 않은 만남들이 이어지고, 셀린과 제시, 두 인물의 발길을 따라 쉴 사이 없이 배경이 전환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보통의 장소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마법들은 장면, 장면 속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금세 사라지고 만다.

  <Before Sunrise>에 이어 <Before Sunset>과 <Before Midnight>이 속편으로 나왔기에 이 세 작품을 모두 본 이라면, 제시와 셀린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물론 노년의 제시와 셀린이 또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상해보고 싶다. 세상에 두 속편은 존재하지 않으며, 제시와 셀린의 이야기는 기차역에서 애틋한 이별의 인사를 나누며 재회를 약속하는 때에서 마무리 되었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지. 세상에 모든 것이 마침내 변하더라도, 지난 날,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 때의 사랑이 오직 그 순간으로만 기억되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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