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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Sep 15. 2016

<남과 여>, 이윤기 감독

 한 아이의 어머니와 한 아이의 아버지가 우연찮은 계기로 동행한다. 그들을 구속하던 그들의 자녀는 캠프를 떠나 없다. 아이들이 없는 채로,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그들은 단지 한 명의 여자가, 남자가 된다.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다. 시리게 하얀 눈과 눈보다 더 시린, 죽어버린 것처럼 과묵한 진초록의 나무들이 뒤덮은 숲 속에서.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일어났는데, 애가 곁에 없는 거예요. 애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한 거야. 이런 적이 없었구나.” - <남과 여> 상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무감각한 채로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리적, 정서적으로 가까이 있는 환경 요인일수록 개인에 대한 구속력이 강하다. 개인에게 ‘가족’은, 대개의 경우 가장 가까이 있는 환경 요인이며, 개인의 삶에서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부분이, 다양하고 또 복잡한 형태로, ‘가족’이라는 안락한 감옥에 속박되어 있다.

구속된 개인의 삶은, 마치 쇼윈도 안의 마네킹처럼

 그 감옥이 ‘도덕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생태학적 차원에서든’ 영원해야만 한다는 명제에 대한 사람들의 맹신은 놀랍다. 사람들은 그 감옥이 해체되어 버릴까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설령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감옥만은 지키기 위해 애쓰거나 애써야 하는 게 지당하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가족은 기꺼이 해체되어도 좋다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 같은 믿음은, 가족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안락하고 견고한 집단이라는 환상에서 기인한다. 

 저울의 양쪽에 달린 개인과 가족이 완전히 수평을 이루기란,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결코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서의 개인의 내면에는 균열이 생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 <남과 여> 기홍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과 여> 기홍

 하나의 개인이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 내포하는 육체, 감정 모두는 몹시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방만하게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이유로, 개인의 비극이 초래된다.

 순간의 사랑을 일상에 옮겨놓으려 하니 고통이 따른다. 찰나의 시간, 현실이 아닌듯한 공간 속에서의 남녀에게만 허락되었던 모르핀이다. 일상에는 우연한 남녀가 아닌 기홍과 상민이 있다. 그들을 둘러싼 단단한 주변 환경들이 있다. 가족이 있다. 기홍과 상민에게 그런 사랑은 사치다.

영화 <남과 여> 스틸컷

 알랭 드 보통은 책 <사랑의 기초 - 한 남자>에서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어른의 사랑은 그토록 부자유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강요당한다. 

 슬프게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어디 여행하는 것 같아요." - <남과 여> 기홍
“돌아가지 말까요?”- <남과 여> 기홍

 기홍과 상민은 같은 선택을 할까. 저울의 어느 축을 더 무거이 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그럼에도, 개인을 지금보다 조금 더 무겁게 보려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조금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기홍, 공유.     
<남과 여> 기홍 역의 배우 '공유'

 2016년, 배우 공유는 세 작품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밀정>까지. 세 작품들 가운데 공유가 가장 돋보인 작품은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이다. 나는 언제나 공유가 내면 연기에 능한 배우라고 생각해왔다. 강렬하게 도드라지는 느낌이 아닌 예민하고 섬세한 느낌의 연기를 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그는 꾸준히 그렇게 연기해왔지만, 그의 연기가 그 자체로 순진무구하게 빛을 발한 작품이 <남과 여>가 아닐까 싶다. 그는 강인하면서도 여리고, 비겁하지만 사랑스러운, 그런, ‘기홍’을 만들어냈다.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것도 (내게, 그에게, 아마도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멜로 영화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 전도연은 강렬한 느낌과 섬세하고 예민한 느낌을 모두 표현해낼 수 있는, 보석 같은 배우다. 공유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물오르도록, 전도연은 훌륭하게 완급조절 했다.

 공유의 아름답고 가슴 저리는 내면 연기를 또 볼 날을 기대한다. 그런 작품이 나올 때까지 나는 몇 번이고 <남과 여>를 보고 또 볼 테다.

영화 <남과 여> 포스터

* 모든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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