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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Dec 04. 2016

<꿈의 제인>, 조현훈 감독

* 주의: 영화 <꿈의 제인>의 ‘스포’가 왕창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정한 이 영화의 끝은 소현(이민지)이 그은 제 팔을 물에 담그고 욕조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던 장면이다. 허무한 생명이, 투명한 죽음의 촉매제를 검게 물들이며 빠져나가던 장면. 소현은 거기, 그 장면에서 죽었다.

 제인(구교환)의 집에 머물며 제인과 함께 나눈 외롭지 않던 시간들은, 소현이 꾸었던 꿈일 것이다. 아마도 삶의 대부분의 시간들을 홀로 보냈을, 소외와 고독 속에서 소모되어간 한 인간이 생의 불행한 순간들 속에서 꾸었던 꿈. 그 행복한 꿈이 제인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소현이 죽었으니까. 소현은 제인과 죽음 이후에라도 꼭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 <꿈의 제인> 스틸컷(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꿈의 제인>은 제인의 말에 따르면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한 소수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소수자들은 그들이 ‘소수라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약하다’는 성질이 ‘선하다’는 성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소수자들을 소외하는 것이 첫 번째 불행이라면, 소수자 집단 안에서 또다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은 두 번째 불행이다. <꿈의 제인>은 그 두 번째 불행의 모습을 꽤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소수자의 집단 안에서 다시 강자와 약자가 나뉜다. 기준은, 물질이 되기도 하고, 세력이 되기도 하고, 성별이 되기도 하고, 나이가 되기도 한다. 강자는 가해자 또는 방조자가 되어 약자를 대상으로 감시, 폭행, 강간, 살인…을 벌인다. 범죄의 타깃이 되지 않은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타깃이 된 다른 약자가 감시, 폭행, 강간, 살인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방조할 따름이다.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종종 바뀌기도 한다.

 제인의 영역에는 이 극악하여 안타까운 두 번째 불행이 없다. 제인은 두 번째 불행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호자, 구원자다. 제인은 ‘너희가 네 명인데 케이크가 세 조각이라면 차라리 모두 먹지 마라. 그래야 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개인의 힘이 각각 다를 때,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할 최후의, 그리고 최소한의 도리를 제인은 말한 것이다. 이것이 제인이 ‘꿈의 제인’인 까닭이다.

영화 <꿈의 제인> 스틸컷(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소현이 소위 ‘패밀리’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쉼터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패밀리’를 찾아다니는 이유에 대해 <꿈의 제인>을 연출한 조현훈 감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쉼터‘가 더 나은 선택으로 여겨질 테지만, 소현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수자’들을 ‘사회적 약자’로 만드는 것은, 단지 ‘대다수’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생각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다수자’들의 폭력적 이해와 그로부터 발생한 행위이다. 폭력적 이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행위가 소수자들을 외롭고 또 불행하게 한다.

 이 사회의 소수자로서(모순. ‘소수(少數)’자라지만, 누구인들 소수자가 아닐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제인의 말로 위로받는다. ‘불행한 얼굴로 또 만나요. 내일도, 모레도.’ 면면이 불행한 낯이라도, 가끔은 돌아봐주기. 기나긴 불행한 인생 가운데 찰나라도 행복할 수 있도록.

뒤돌고 나니 금세 그립다. 꿈의 제인…     

영화 <꿈의 제인>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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