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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Jan 18. 2017

<남영동1985>, 정지영 감독

남영동1985, 그 암담한 생생함

남영동1985, 그 암담한 생생함

(2012년에 쓴 글)

영화 <남영동1985> 포스터

 아주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지난 금요일. 다행히 겨울의 밤은 빨리 와서, 나는 그리 늦지 않은 저녁 남영동1985를 보기 위해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던 나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떠오른 영화 속 장면들 때문에 괴로웠다.
 가을 학기 들어 들었던 <영화론> 수업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시간은 ‘사실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내용을 다룬 첫 시간이었다. 그 날의 강의는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난다. ‘사실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교수님은 ‘사실주의와 형식주의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잊히지 않는다. 교수님은 또, ‘사실주의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때로 극도로 양식화 되어 있지만 그 양식화된 느낌을 감추는 기술이 뛰어나다.’라고 말씀하셨다. 역시 잊히지 않는다. 교수님은 언제나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영화가 어떤 방법으로 말하는지를 살펴보라’고 강조하셨다. 남영동1985는 매우 사실적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하고 싶었나. 바로 ‘공포’였다. 영화는 수많은 고문 장면들을 고도로 양식화하여 표현했지만 양식화된 느낌은 지워버린 채 매우 사실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초적 감정인 ‘공포’에 호소하고 있었다.
 영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이 적절히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배우의 연기력. 그리고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명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미장센, 인물 배치도 중요하다. 쇼트. 당연히 영화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어떻게 촬영하느냐’는 ‘어떻게 담아내느냐’이고 곧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편집도 중요하다. 장면의 배열 순서를 다르게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요소들이 채워져 하나의 사실주의적 영화를 탄생시킨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숨 가쁘게 진행된다. 영문도 모르고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온 김종태는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옷이 벗겨지고 얻어맞는다. 김종태가 어떤 일을 하다가 어떻게 끌려왔는지는 이야기가 조금 진행되고 난 후 ‘물’이라는 유사성을 이용한 장면전환을 통해 보여준다. 만약 김종태가 목용탕에서 나와 끌려오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두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하나, 전반부에서 속도감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둘, 영웅형 인물인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가 평범한 사람과 같이 나약해져 가며 느끼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첫 장면에서 암흑 속 어지럽게 흔들리는 불빛은 김종태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는 듯 느껴진다.
 도입부에서의 미장센 또한 매우 적절하다. 우악스럽게 끌려와 한참을 구타당한 뒤 의자에 앉혀진 김종태를 둘러싸고 있는 그 구도는 매우 고압적인 느낌을 주며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까지 그 위압감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김종태가 처음 고문실로 ‘이사’했을 때의 장면이었다. ‘고문실’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어둠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 장면에서 고문실은 싸늘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심지어 전혀 어둡지 않았다. 시간적 배경이 낮이기도 했지만 고문실의 조명은 매우 밝았다. 추측하건대, 이는, 첫 번째,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군가 그토록 참혹한 짓을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바깥세상과 남영동 고문실의 공간적 대비를 이루고 싶었던 의도 이거나, 두 번째, 그토록 밝은 곳에서 잔인한 고문이 행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공포심을 조금 더 끌어올리고 싶었던 의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장면에서의 밝은 조명은 결코 긍정적인 느낌이 아닌 부정적인 느낌을 더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앵글은 영화에서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안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로우 앵글은 관객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고 그 감정을 ‘분노’로 발전시키는데 필연적인 역할을 한다. 극중에서 이두한이 김종태를 깔고 앉거나 허리띠로 목을 묶어 그를 개처럼 끌고 다닐 때 잡힌 로우 앵글은 배우 이경영의 연기를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비록 음악은 아니지만 극중에서 디제시스적(diegetic) 음향효과였던 이두한의 휘파람은 부가적인 효과기는 했지만 상당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영화의 후반부, 김종태와 이두한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김종태가 휘파람 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것은 그 소리가 공포를 극대화 시키기 위한 장치였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고문에 지친 김종태의 눈앞에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장면과 또 다른 김종태가 현실의 김종태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앞서도 잠깐 언급했듯,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가 점차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 버리는 것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다음으로, 또 다른 김종태가 등장하는 장면은 육체적으로 가해진 비인간적이며 극도로 가학적인 고문의 반복이 김종태의 정신을 아주 많이 나약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격렬한 내면적 갈등을 겪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

 영화 속에서 표현한 모든 고문은 잔인했다. 어떤 고문이든 괴롭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고문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높여가고 있으므로 이 같은 관점에서는, 후반부의 전기 고문이 가장 끔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기 고문을 당한 김종태의 나신을 감독은 하이앵글로 잡는다. (줌 아웃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황당한 연결이겠으나 이 장면을 본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가 떠올랐다. 이상적인 인체비례를 표현한 이 그림이 영화의 내용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트루비우스의 이 그림에 주목했던 이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라고 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영화 속 나신 장면은 ‘인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장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CL(Extreme Close-up Shot)은 이 영화 속에서 결코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적절히 사용되었다. 특히나 김종태의 눈을 이러한 쇼트로 잡는 것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고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아주 좋았다.
 영화에는 파리가 등장한다. 한낱 미물인 파리가 이 영화에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는 파리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화에서 파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고민했다. 고민을 하다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의 숙제를 교수님은 너무나도 쉽게 풀어주셨다. 인간의 모습이 마치 파리의 목숨과도 같은 비참한 상황을 보여준 것이라고. 파리의 동선을 따라가는 김종태의 시선을 통해 전해진다. 물론 김종태의 시선은 카메라 이동이다. 남영동 고문실에 갇혀 버린 두 미.물. 김종태와 파리의 모습은 일종의 충돌 몽타주를 형성하기도 한다. 한 공간에 있는 두 존재를 두고 충돌 몽타주라니 어색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A⨉B=C’라는 충돌 몽타주 공식에 따르면 영화에서 나타나는 이 장치도 ‘김종태⨉파리=인간의 목숨이 미물의 목숨과 다를 것이 없이 취급되는 처참한 상황’으로 대입하여 정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사실주의적이다. 물론 실화를 담아냈다고 해서 모두 사실주의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화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가 관객에게는 곧 ‘사실(Fact)을 말하고 있는 영화’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설명한 이 모-든 이유로 혹은 별개로, 나에게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사실주의 영화이다. 자꾸만 생각나고 그래서 종종 괴롭다.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의외로 내가 그리 강심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영화이다. ‘고문 전시장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관객들과 함께 아파보고자 했다.’는 정지영 감독의 말처럼, 나도 앞으로 조금 더 아파야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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