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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Mar 23. 2017

<미스 슬로운>, 존 매든 감독


영화 <미스 슬로운>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그 얼굴은 승자의 것이 아니었다.

 청문회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후에… 아니, 그것은 단지 청문회의 상황을 뒤바꾸는 소란이 아니라, 미 수정헌법 2조를 흔들 결정타였다. 뒤엉킨 사람들의 틈 밖에서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의 옆얼굴은 지쳐있었고, 힘을 잃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는데, 와중에 머리에는 물음표가 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청문회인가.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애초부터 남는 것이 있을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슬로운은 그 프로젝트에 제 자신까지 수단으로 써버렸으니까. 게다가 자기 자신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선택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녀 스스로가 계획한 데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슬로운이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 같은 선택을 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선택의 당사자인 슬로운이 영화 안에서 분명히 밝혔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모든 결정이 비롯되었다고. 설령 그것이 신념 때문이었대도 그녀의 선택은 옳지 않았다. 그 어떤 대단한 신념이, 감히 인간을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 보자면, 엘리자베스 슬로운의 신념은 미 국민 개인이 총기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미 수정헌법 2조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총기를 구매할 때 구매자의 신원을 철저히 확인함으로써 범죄를 저지를 잠재적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총기를 구매하지 않게 하고 이로써 총기를 활용한 강력 범죄나 테러를 방지하자는, 말하자면 총기 구매 및 소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자는 것이 요점이다. 이 신념의 허점이 무엇인지는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무엇을 구매하고자 할 때에, 그것이 설사 총기일지라도(총기 구매 및 소지가 합법이라는 전제 하에), 오직 내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민감한 개인 정보가 공권력에 의해 탈탈 털려야 할 까닭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사실 이조차 무의미한 반항이기는 하다. 이미 감시 사회가 아닌가.) 다음으로, ‘잠재적 범죄자’를 규정하는 문제가 있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공권력이 개인을 ‘언젠가, 어쩌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차라리 총기 구매 및 소지 자체를 전면 금지하자는 것이라면 모를까. 슬로운이 내세운 그 신념이라는 것은, 다분히 타협적이고, 일관성이 없다.

 신념이란 것의 속성이 본디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상황에 맞춰 모습을 바꾸는 성질 말이다. 신념이야 아무래도 좋다. 오직 하나만 지켜지면 족하다. 인간은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목적적 존재여야 한다는 것. 이는 신념조차 되지 못한다. 이 이야기를 같잖게 여기는 사람들이 워낙에 많으니. 슬로운의 선택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신념 때문에든 욕망 때문에든, 다른 사람을, 심지어 자신마저도 목적적 존재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각각의 사람에 대해 효용값을 매기고, 쓰임을 정해 활용했다는 것. 나의 눈물은 그래서 흘렀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에게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임을 진작부터 알았기 때문에. 나 또한 부족한 점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으로서 역시나 부족한 점이 많은 그녀가 가여웠기 때문에.

 <미스 슬로운>. ‘진짜 정치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 ‘치열한 로비전쟁을 담아낸 영화’라지만, 특히 최근 들어 진짜(real) 정치계의 지독하고, 구제불능 같은 모습을 알게 되어서일까. 영화가 그리 대담해보이지도, 조밀해 보이지도 않는다. 스릴러를 기대하면 여러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다만, 개인의 내면과 인간관계의 서사를 다루는 드라마에 집중하여 감상한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한 작품이다. 존 매든 감독의 전작 중 유일하게 <셰익스피어 인 러브, 1998>를 보았는데, 표현 그대로 드라마틱한 서사의 전개에 감동하여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미스 슬로운>에서도 서사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과 힘은 보는 이를 동요하게 할 만 하다.

슈미트 그리고 슬로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아쉬운 것은, 주인공과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들의 성질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크 스트롱이 맡은 슈미트라는 캐릭터와 마이클 스털버그가 연기한 코너스라는 캐릭터는, 주인공에게 서사의 모든 힘이 집중되는 바람에 주인공 슬로운과 보다 극적인 대립각을 세울 힘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배우 구구 바샤 로가 열연한 에스미 캐릭터와 알리슨 필이 연기한 제인 캐릭터가 영화 속의 주요한 여성 캐릭터로서 주인공인 미스 슬로운과 연대하는 소위 ‘워맨스’가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달래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슬로운 그리고 에스미, 워맨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살아가는 것은 배워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고매한 분들이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남겼지만, 굳이 고매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쯤, 제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관, 신념, 욕망을 가진 이들이 부딪치고 다듬어져가는 과정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영화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잠시 돌아보라고. 쉬어가고, 배워가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우리 모두는 경주마는 아니니까.

(말이 무슨 죄....... 참, 여러모로.)

멈추고, 배워가라고.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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