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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Jun 02. 2017

<동주>, 이준익 감독

설은 젊음일지라도. 본연의 순수, 저항.

* 2016년 2월 23일에 쓴 글입니다.


 오늘 밤에도별은 바람에 스치어 떨었다. 바람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불었다. 별이 떠는 것은 그 둘 모두 때문이었지만, 실은 안에서 부는 바람의 탓이 컸다. 젊음이란 본디 떨림이다.

 젊은 주제에, 젊음을 몰랐다. 한 때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도 어느 한 작품 무난히 흘려버린 적은 없었다. 작품으로부터 전해 오는 떨림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다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동주의 시는 입시를 위해서라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작품이었다. 당연히 나는 동주의 작품을 가르침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돌이켜보니 그 때조차 나는 동주를 몰랐다. 모르는 주제에 감히.

윤동주(사진 출처: 네이버)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갈 테다. 동주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젊음이 떨림인 까닭은 항시 어떠한 형태의 분열 속에서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분열이며 자아와의 분열이다. 동주의 시는 고요하나, 처절하다. 읊조리고 있으나 외침이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쉬이 화합하지 못하는 분열된 자아의 평행선 사이, 그 어느 지점에서 동주는, 길지 않은 온 생(生)을 소슬히 떨며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동주, 그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무엇하나 온전하지도, 오롯하지도 못한 채로 세상 어느 구석에서 서성이기는 몽규도, 처중도, 여진도, 쿠미도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젊음은 마치 흑백영화처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동주>는, 무정한 흑백의 프레임 안에서도 젊음의 떨림과 부끄러움을 섬세하게 살려냈다.

자화상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것은. 동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짐승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을 내세워 국가가 국가를, 민족이 민족을 침탈하였던 제국주의 시대. 세상의 모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죽어가게 만드는 힘에 맞서, 그는 가엾이 죽어가는 모든 생(生)과 명(命)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안에서 동주의 문학은 실제(fact)인 양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흐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허구인지 아닌지의 차원이 아니다. 그보다 동주가 시에서 살려낸 것들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주가 시에서 살려낸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거창하기만 한 이념 따위가 아니었다. 아우의 상기된 얼굴과 철없는 대답, 어여쁜 벗과 함께 나눈 추억, 차창으로 지나는 소중한 풍경, 가여운 젊음....... 동주가 살려내려 한 것들. 모두 제국주의의 총부리에 스러져간 것들.

지켜내고 싶은 것들에 대한 노래..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수많은 젊음들이 눈물 흘린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설은 젊음들은 각자가 또 다른 동주다. 강하늘(동주 역), 박정민(몽규 역), 민진웅(처중 역), 신윤주(여진 역), 최희서(쿠미 역) 등 영화 <동주>의 배우들은 예와 지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보통의 젊음들을 멋지게 연기했다.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면에 자리한 부끄러움과 끝없이 투쟁하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순수. 그것만이 오로지 중요하다. 다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젊음들이 부디 이 마음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젊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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