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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Jun 01. 2017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 서동일 감독

브런치 무비패스 #서울환경영화제

이하는 나의 무지와 무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만날 다니던 집 앞 큰 길에서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그것이 거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다가다 스치듯 본 것 같기는 한데, 그 또한 자신할 만한 기억은 아니었다. 아마 감각하였어도 지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한살림’이 늘 거기에 있었다 하여도, 내게는 ‘처음’ 안 것, ‘발견’이었다.     


‘한살림을 발견했다.’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까닭은 마침 그 발견이 이틀 전 제14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서동일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를 본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리하여 나의 감동과 놀람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영화제에서 작품을 감상한 후에, 협동조합, 특히 생활협동조합이라는 ‘존재’가 평소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옴을 느꼈는데, 그 존재가 바로 나의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불시에 깨닫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쨌거나 한살림을 발견했을 때, 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시금 결심했다.


영화는 ‘함께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기록이다. ‘함께 먹고 사는’에서는 모든 단어가 중요하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함께’ ‘먹고’ ‘사는’의 감도로 느껴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함께’는 사람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나아가 사람과 자연(사실 사람을 자연과 분리해서 언급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지만)을 모두 아우르는 ‘함께’이다. 얼마쯤 전에, 최 훈 교수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사월의책)>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으로 예상할 수 있듯, 책에서는 인간의 육식에 대해 논한다.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나, 저자는 ‘육식을 해도 괜찮을’ 조건이 전제된다면 육식이 문제될 것은 없다는 단서를 달아놓기는 한다. 그 ‘육식을 해도 괜찮을’ 조건이란, 동물이 1) (정신적, 육체적)고통 없이 길러지고, 2) (정신적, 육체적)고통 없이 죽어진다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조건을 충족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기에 결국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난 후부터 나는 육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음식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된 감정의 발현을 느껴야만 했는데 특히 죄책감을 자극하는 부분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을까’보다도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에 등장하는 어느 돼지고기 생산자는 돼지들을 좁은 우리에 가두어 기르지 않고, 너른 풀밭에 방목하여 기르고 있었는데, 가축 사육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돼지들이 큰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프레임 속의 돼지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따랐으며 풀밭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결국에 식‘용’으로 되어버리는 동물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과정은 의미 있는 노력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고통으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한다. 자신이 먹는 고기가 어떠한 환경에서 길러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도살되어 밥상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헤아림 없이 고기를 먹는다. 자신이 직접 동물을 기르고, 죽이고, 먹이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사람, 고통으로부터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최소한도라도 동물이 겪을 고통을 알 수 있다.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에 육류 생산자가 나온 것은 앞서 말한 사례 한 번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하나의 사례로도 나에게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존재해야 할 당위를 전하기에 충분했다.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먹’는 행위는 사소하면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상이다. 내게 무엇을 먹는 일은 종종 즐거움이지만, 대개는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숙고 없이 먹을 것을 선택한다. ‘먹는’다기보다 ‘때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하다. 실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단지 메뉴 선정에의 고민이 아니라 어떤 재료, 어떤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음식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안전하고 건강한 식재료와 위생적인 조리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있었다. 관심은 있으나 그것이 전부다. 현대인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조리 환경과 재료의 안전성에 대해 일일이 따져볼 겨를이 없다. 이를테면, 이 고기가 어떻게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도살되었는지까지는 아무리 까다로운 선별자라도 굳이 생각지 않는 것이다. 대개는 그저 ‘믿고 먹’는다. 하지만, 어떤 식재료를 선택하느냐, 즉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사는’ 것이 또 중요하다. 사람은 혼자서도 살고 함께도 사는데, 앞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사람이 사람과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한살림은 그 자체로 ‘사는’ 행위를 대유한다. 한살림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소비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모여 형성한 생활협동조합으로, 생산자 네트워크도 결성하여 생산자의 이익도 보호하고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 생산자는 안전하고 질 좋은 식재료를 생산하고, 소비자는 합의를 통해 정해진 가격으로 식재료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질 좋은 식재료를 소비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망과 합리적인 이문을 남기고 싶다는 생산자의 욕망은 결국 생존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욕망이다. 한살림은 또한 소비자와 생산자간의 정기적 만남을 촉진하고 이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동하도록 장려한다. 나 홀로 생존이 아닌 공존, 공생이 한살림의 궁극적 지향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잘 왔다, 같이 살자>를 본 것은, 내 안에 흩어져 있던 ‘함께’ ‘먹고’ ‘사는’ 것에 관한 막연한 고민과 나약한 정보들을 조금 더 끈끈하게 결속하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행동하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작품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어떤 선전의 뉘앙스가 풍기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줄이고 싶었던 감독의 바람이 담긴 결정으로 해석된다. 내레이션이 없이도,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생각을 통해 감독이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된다. 소비자와 생산자 간 목소리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도 느껴진다.     


작품은 애초에 한살림으로부터 출발한 프로젝트이다. 일부 관객에게는 시작부터 끝까지 ‘한살림’을 연호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좀 어떠랴. 89분이라는 러닝타임은 단 한사람의 살아감을 이해하는 데에도 한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평소 협동조합에 관심이 있었던 이라면 흥미로운 공부가 될 만한 작품이다. 아, 나에게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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