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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Aug 13. 2017

<덩케르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덩케르크>, 그리고 <군함도>와 <택시운전사> 가 역사를 바라는 방식

<군함도>(류승완 감독)를 보고, <택시운전사>(장 훈 감독)를 보고, <덩케르크, Dunkirk>(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를 보았다. 마침내 답을 찾은 듯 했고, 비로소 쉬었다 싶었다.     


<덩케르크>가 <군함도> 그리고, <택시운전사>와 달랐던 건,

역사를 향한 바람의 차이였다.     


영화 <덩케르크>는 세 개의 공간과 세 개의 시간으로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본래 불분명하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헤아릴 수 없는 공간들을 이곳과 저곳으로 나누는 기준은.     


‘있음’, 그리고 ‘없음’이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던 무엇이, 지금 저곳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시간과 공간에 경계가 생기는 것이다. 동시의 시(時)와 공(空) 사이에(間) 머물렀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면, 시공을 공유했다고, 공존했다고 할 수 없다. <덩케르크>에서, 해군이 공군에게 “(덩케르크 철수를 위해) 너희 공군은 대체 뭘 했느냐?”고 비난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의 시공이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한편, 역사를 반추하는 행위는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고, 나아가 이해하려는 시도임에 피아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덩케르크>를 보며, 나는 덩케르크와 공존했다. 그 때, 그 곳, 그들과.     


그러나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를 볼 때에, 나는 그 때 그 곳의 그들과 공존할 수 없었다. 존재를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작품들에서는 ‘존재’를 지워버리는 대신 ‘공허한 영웅’을 탄생시켰다. <군함도>의 박무영(송중기)이나 최칠성(소지섭)을 비롯해 심지어 이강옥(황정민)까지. <택시운전사>의 김만섭(김사복, 송강호)과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영웅을 선택하고 그 영웅에 모든 신화(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은 장르와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는 통속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그 같은 서사 전개 방식은 이제 관객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이제 관객들은 익숙한 서사 전개에 대해 어딘가 조금 진부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통속적인 스토리텔링을 선택하는 까닭은 안전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익숙하게 느끼는 흐름에 맞추어 서사를 전개했을 때, 적당히 소비되어지고 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8월 13일 기준, <택시운전사>는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군함도>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통속적 스토리텔링 방식을 선택하는 것까지야 아쉽기는 해도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은 아니지만,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므로 비판의 여지가 발생한다. 문제는 단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음이 아니다. 역사를 향하는 바람이 문제다. <군함도>와 <택시운전사>는 역사를 단지 소비하기를 바랐다. 실제 감독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두 작품이 존재를 지워버리고 영웅을 만들어 낸, 통속적이어서 수익성을 거두기에 안전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택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영웅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영웅만 드러난 것이 나쁘다. 영웅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웅의 존재만 인지하는 것이 폭력적이다. 역사, 특히 가슴 아픈 역사를 이야기 할 때에는 누구든 신중해야 한다. 단지 그 때, 그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당하고, 고통을 겪고, 상처받은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들을 함부로 지우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군함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면면(面面)이 없었다. <택시운전사>에서는 푸르른 봄날, 국가가 자행한 끔찍한 학살극 속에서 자신, 가족, 친구, 이웃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하염없이 붉은 피를 쏟았던 광주시민들이 화면에 표정 한 번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허무하게 분리되어 버린 시공의 경계를 느껴, 나는 자꾸만 눈물을 쏟았다.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나 스스로 감당하고 있었다.   

  

보편자로서의 존재. 이기적인 인간. (사진 출처: 네이버)

<덩케르크>를 보며 내가 그 때, 그 곳의 존재들과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존재들을 인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덩케르크>에서는 존재들이 온전히 드러났다. 영웅은 없었다. 존재들은 그저 존재들이었다. 개별자로서의 인간이면서, 보편자로서의 인간이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였으나, 똑같이 삶을 열망하였고 이기적이었다. 영화가 영웅을 지우고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감추는 것’이었다. 톰 하디의 얼굴을 가리고, 킬리언 머피의 이름을 지우고, 바다에 빠진 병사들의 얼굴에 검은 기름을 덮은 것이었다. 영화 속 인물 가운데 누구 하나 개별로서 돋보이지 않았고, 오직 덩케르크의 병사들로만 정체성을 가졌다. 관객들로 하여금 보통의 인간들, 그 존재를 인지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역사를 소비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공존하기를 바랐다. 영화가 존재들을 드러낸 것은, 작가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덩케르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킬리언 머피(구조된 병사 역)가 톰 글린 카니(피터 역)에게 배리 케오간(조지 역)의 상태를 물었을 때, 배리 케오간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톰 글린 카니가 “괜찮다.”고 답한 장면이었다.(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길. 영화를 본 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 장면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오롯하게 이해하는 순간을 담아냈다. 상대가 결코 특별하지 않아도, 상대의 존재를, 상대의 결함까지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영화가 영웅을 배제하고자 한 의도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덩케르크 철수에 대한 처칠의 연설문을 핀 화이트헤드(토미 역)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장면이다. 진정한 영웅은, 역사는, 그 때 그 곳에 머물렀던 바로 그 존재들이라고, 영화는 담담하나 호소력 있게, 읊조렸으나 큰 외침으로 전하고 있었다.  

시공의 분리, 공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영화 <덩케르크>는 세 개의 공간과 세 개의 시간으로 이야기한다. 놀란 감독은 시공을 읽어내는 자기만의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후에 또 이야기해 볼 일이다. 영화가 허락한 시간들.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1시간은 각각의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시공으로 합쳐진다. 각각의 시공이 결국 하나의 시공으로 연결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은 물론 있다. 키는 킬리언 머피다.(Key is Cillian.) 시공이 합쳐지는 순간에 비로소 끈질긴 시공의 힘을 느낄 수 있고, 존재들의 유의미함이 증명된다. 감동적이다.   

Key is Cillian.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바다를 건너 Home으로 가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덩케르크>는 마침내 바다를 건넜는데, <군함도>는 그리하지 못했다. 비극이다. 존재를 인지하고, 그리하여 공존하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최선의 방식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문 및 제목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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