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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Sep 25. 2017

김종관 감독 첫 번째 이야기, <더 테이블>

김종관 감독의 오랜 팬은 아니었다. 그의 최근 개봉작 <더 테이블>을 보고 나서 오랜 팬이 되고 싶어졌다. 내가 알지 못한 날들에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보았다. 최근의 장편부터 예전의 단편들까지. 감독에게는 고집이 있었고, 그 고집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한동안 내가 할 이야기는 그 고집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근래에 비교적 꾸준히 영화산업의 한계로 꼽히는 것이, 여성담론의 부족이다. 그러나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에 영화산업의 각 주체들에게 여성담론 부족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는 듯 보인다.

여성담론은 영화산업에서 여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주로 어머니이거나, 애인이거나, 범죄의 피해자(매춘부 포함)이다. 남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는 정말 흔하지 않다. 그에 비해 남성의 역할은 그 폭이 넓다. 남성의 역할은 아버지이거나, 애인이거나, 범죄의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이 범죄의 가해자이고, 해결사거나, 친구이거나, 형제이면서, 영웅이기도 하다. 남성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으로부터 크게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며, 종종 여성을 수단으로 여긴다.

그것이 얼마나 비겁하고 지질한지, 옳지 못한지 <더 테이블>에서는 드러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그러나 흔하고 낡은 남녀관계의 공식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여성의 감정과 의지에 주목하며, 여성 캐릭터들의 행위에 긴장감을 주어 관객이 몰입하게 만든다. 여성 캐릭터의 행위와 결정들은 납득할 만하거나 상상해봄직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며, 그것은 여성 스스로 만들어낸 근거이다. 더욱 훌륭한 것은, 남성 캐릭터를 배제하거나 소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남성 캐릭터의 감정과 의지도 영화 속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운철(연우진)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의 욕망은 무엇인가하고.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당해의 지점에서 <더 테이블>은 균형적인 영화였다. 남녀 관계의 균형 뿐 아니라, 네 개의 각 에피소드에서 주도권을 가진 캐릭터와 동반하는 캐릭터 간의 균형 또한 적절했다. 굳이, 주 조연을 따지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의 균형이었다. 수로 따지면 여성 캐릭터가 월등히 많았다. 영화에는 여섯 명의 여성과 세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남성 캐릭터가 지배적인 영화에서는 힘의 논리가 자아내는 긴장감이 서사를 이끌고 인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만, <더 테이블>의 서사는 극중 캐릭터의 감수성과 관객의 감수성이 만나 헤아려지며, 극중 인물들은 질서와 위계보다는 합일과 연대를 지향한다.

<더 테이블>은 사건이 아닌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차분하고 정적으로, 영화는 인물들의 딱한 감정들을 충분히 드러내려 애쓰고 있었다. 감독은 관객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기를 바라는 듯 했고, 주변의 소소한 풍경과 상황들은 감독이 프레임에 담아 전달할 때만 관객에게 허락되었다. 화면에 비추어진 풍경들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어, 내 눈에 눈물 고인 채로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인데, 주책없이 가슴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어 자꾸만 존재들을 연민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카메라가 소용없는 연민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위로받았다.

<더 테이블> 촉촉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영화가 카페를 배경으로 한 것은, 그곳이 사람들에게 편안하거나 친숙한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낯설지 않은 장소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관객마저도 영화 속으로 부드럽게 흡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감독의 궁극의 배려는 아닐까.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나서면서 공허를 느끼는 관객이 많다. 한두 시간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던 영화 속 세상이 실은 현실과 분리된, 허구의 세계임을 금세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면, 부러 영화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없다. 영화 속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 또는 내 옆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

경진(정은채), 민호(전성우).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이러한 이유로 <더 테이블>은 참 따뜻한 영화였다. 영화 속 네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사랑스러웠다. 하루의 아침, 낮, 오후, 늦은 저녁 머물다간 만남들. 카페의 젊은 주인에게는 일상에 지나지 않을 투박한 재회들.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시작 모를 꽃가지만이 소소하게 기념하는, 오직 두 명의 사람에게만 빛바랠 순간들. 나는 특히 경진과 민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혜경과 운철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카페 주인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혜경(임수정), 운철(연우진). 우리가 이별하는 과정.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다음 글에서는 김종관 감독의 2016년 작품 <최악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제목 및 본문 사진 출처는 모두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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