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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Oct 05. 2017

김종관 감독 두 번째 이야기,
<최악의 하루>

누가 은희일까.

누가 은희일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내가 은희다.


나는 나를 아는 척 한다. 자주 그런다.

이른 저녁부터 만난 친구와 늦은 저녁까지 술을 마신 날. 유난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자꾸 튀어나왔다. 은은히 취기가 오른 후에는 체면조차 거칠 것 없이 “나는…!” “나는!”하고 외쳤다. 나도, 친구도 그랬다. 날이 깨니 민망해졌다. 닿지 못할 무수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건지, 어떤 나를 호소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간절하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잘 알지 못한다.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차라리 취했으면 싶은 순간은, 누군가 나를 규정하려 들 때다. 이를테면 이토록 폭력적인 질문으로서.

   ‘당신의 장점은 무엇인가?’ ‘당신의 단점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나의 일부가 장인지 단인지 신임할 수 없다. 나의 일부는 상황에 따라 장이 되기도 단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아는 나의 일부가 나의 것이 맞기는 한 것인지조차 혼란스럽다.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은 진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보다 노골적인, 이 질문을 받으면 졸지에 나는 우두망찰해진다. 상대가 원하는 답을 주고 싶은데, 헷갈려서다. 나는 한나절 내내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이는, 질문을 던진 상대가 원하는 답의 방식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내가 다시 묻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이길 바라는지. 상대는 제멋대로 판단할 것이다. 나의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무엇으로 물어도 나의 진심은, 내가 드릴 수 있는 진실과 거짓은 나에 의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관계하고 있는 이에게 달린 문제다. 호소는 소용없다. 안타까운 일이라, 차라리 취해버려서 관계인이 무어라 생각하든 나는 내 멋대로 흥겹거나 서러워하고 싶을 때가 많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관계 속에서 촉발하는 진실과 거짓의 향연을 그려낸다. 은희에게 떨어지는 수많은 질문들과 규정들.

직업이 무엇인가 … 어쩐지 예쁘다 … 그 새를 못 참고 다른 사람을 만나 … 은희 씨는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 벌써 잊은 거 아니죠? … 어떻게 된 거야? ……․     

그녀의 진실과 진심을 캐어내 보려는 용감한 시도들.

    

누군지도 모르는 날과 씨가 만들어 가는 것이 관계다. 단 한 번뿐일 만남에서라면, 고역이기는 해도 날과 씨는 서로(혹은 스스로) 욕망하는 모습대로, 바라는 진실로서 있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는 반복되면서 지속된다.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날과 씨는 서로 욕망하던 것과 다른 상대의(혹은 자신의) 모습에 직면한다. 바라던 모습이 진실이 아닐 수 있듯이, 바라지 않았던 모습이라고 해서 거짓인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이를 쉬이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은희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들.. 규정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감독이 영화에서 인물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고 꺼내주지 않는 까닭은, 그가 잔인한 오락을 즐기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실은 인물을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모든 관계를 집어던져야만 <최악의 하루> 속 은희는 홀로 감당해야 할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비단 은희만을 편안하게 하는 데 영화는 그치지 않는다. 저마다의 관객들에게도, 지난한 관계의 속에 존재했던 덧없는 진실을 향한 투쟁을 돌아볼 기회를 기꺼이 주고자 한다. 감독은 더불어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욕망이 아니고 싶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갖는 욕망과 집착을 짐짓 쓰다듬어 본 게다.

 

진실을 강요당하는 인물로서 주인공이 반드시 여자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 뭐. 아무런 편견 없이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영화 속 캐릭터들도 실은 반드시 남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물론 <최악의 하루>의 주인공이 여성이어야 하는 데는 분명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하고, 주인공이 세 명의 남성과 어떤 관계로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여성이 남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란 것이 어떻게 한정되는지 풍자적으로 드러내었다. 은희뿐 아니라, 여성 편집자를 대하는 남성 출판사 사장의 태도에서, 여성 잡지 기자를 대하는 남성 출판사 사장과 남성 작가의 태도에서도,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여성을 대하는 일부 남성들의 진부하고 너절한 사고 양태가 일상처럼 표출되었다. 이 드러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감독의 분명한 목표의식, 고집에 따르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왼쪽부터) 은희 역의 한예리 배우, 출판사 사장 규환 역의 김준범 배우, 작가 우헤다 료헤이 역의 이와세 료 배우. 이 사진의 느낌이 좋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김종관 감독의 고집은 특별하다. 무엇과 달리 진부하지 않다. 감독은 눈에 띄지 못한 것, 감추어져 있던 것, 그러나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묵묵히 관심을 두고 그 관심을 현화하여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물론 이 해석은, 그가 만든 영화들과 그가 쓴 글 몇 편을 읽고 오직 나의 이해에 따라 추측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도, 별 수는 없다.

고집스럽게, 감독이 그려낼 다음의 이야기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다음 글에서는 김종관 감독의 2010년 작품 <조금만 더 가까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제목 및 본문 사진은 모두 네이버 영화 정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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