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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Jul 05. 2017

<박열> 그리고 <동주><사도>, 이준익 감독

청춘; 실존 구하기

앞질러가는 청춘이면 좋으련만 나는 참 늦되었다.     


연달아 세 번이었다. 지지난해에는 <사도>가 지난해에는 <동주>, 올해에 <박열>. <박열>까지 보고나서야 화면에서 부르짖는 이가 모두 한 사람임을 알았다. 사도가, 동주가, 몽규가, 쿠미가, 박열이, 후미코가 모두 같은 사람이었음을. 靑春.     


이준익 감독에 대해 작가론을 쓴 적이 있다. 그가 만드는 시대극에 대한 장르론을 혼합 서술하였다. 이준익 감독이 작품에서 구현하는 미니멀리즘에 대해 논하려 했으나 글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쉬웠다. 영화 <동주>의 작품 비평을 쓴 일도 있다. ‘젊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에 글이 잘 안 써져서 몹시도 골머리를 앓았는데, 의외로 주변의 감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쉬웠다.    

 

그래서 지금, 또 다시 붙들었다. 붙들렸다. <사도>와 <동주>, <박열>을 연달아 보며 소멸되지 못하고 축적된 감정의 찌꺼기가 이번에는 부디 녹아 없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박열, 후미코, 동주, 몽규 그리고 사도 .......     

로 수렴되는 인간의 진부한 이름은 ‘靑春’이다. 힘에 저항하기에 청춘이며, 실존을 지향하기에 청춘이다. 작용하여 외부의 물체나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 힘이다. 영화에서 청춘이 저항하는 것은 자연의 영역에 머무는 힘에 대하여서가 아니다. 이해와 욕망이 침투한 허황된 힘. 권력이나 이념 따위로 불리는, 실존을 해치려는 힘에 대하여 청춘은 저항한다.     

실존을 해치려는 힘에 대한 저항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박열>은 1923년 관동대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죽이는’ 것은 실존을 해치는 대표적 행위다. 관동대학살은 일본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일본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세를 더욱 견고하게 보존하기 위해 벌인 야만적 실존 파괴 행위였다. 당시 내무 대신 미즈노(영화에서는 김인우)를 위시한 일제의 권력자들은 관동대지진 이후 성난 민중의 각성을 두려워하여 관동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때에 일제가 구체적, 개별적 희생양으로 선택한 이가 박열(영화에서는 이제훈)이었다. 박열은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붙잡혔는데, 그 혐의는 일본 민중의 분노가 조선인들에게로 향하도록 하는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천황과 황태자를 죽이려한 혐의는 곧 대역죄로서 사형이 언도될 것이 자명함에도 박열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치 않은 것은 이념과 권력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며 실존이란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를 세상에 명징하게 밝히기 위한 고육지계였다. 떳떳하여 애처로운 청춘.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에게 박열과 후미코(최희서)가 던지는 ‘천황이나 황태자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외침은 곧 실존에 대한 이야기이며, 실존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열과 후미코, 그 청춘은 민중이건 천황이건 결국 모두 낱낱의 실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국에 계층의 구분은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에 맞지 않은 헛짓이라고 주창하였던 것이다. 실존에 대한 역설은 영화 <동주>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같은 민족을 죽이는 이념 같은 거 난 진즉에 관심 없다.” -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박정민)의 말
자화상.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애국주의니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그딴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려고 하는 썩어빠진 관습” -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강하늘)의 말

송몽규와 윤동주의 말도, 결국 이념보다 중한 실존에의 부르짖음이다.  


실존은 ‘먹는’ 행위로서도 증명된다. 존재는 먹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다. 영화 <박열>과 <동주>에서 인물의 먹는 행위, 또는 먹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따라서 실존을 향한 실천이다. <박열>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단식을 한다. 자신들에게 내려진 사형이 천황의 뜻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이감되게 되자, 천황의 뜻, 정확히는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뜻으로 단식투쟁을 벌인다. “개인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선택이 비록 죽음을 향한 것일지라도,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것이다.”라는 후미코의 독백을 통해, 단식이 그 자체로 실존에의 저항이자 증명임을, 그 처절한 역설을 우리는 마주 알고, 함께 처절해진다. <동주>에서 교련 수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본 군인에게 머리카락을 잘리고 밥상을 마주하여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는 시인 윤동주의 모습을 보면서는, 때로 밥그릇에 눈물을 떨구고, 부끄러운 밥을 욱여넣더라도 그것은 바로 실존을 향한 몸부림이기에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실존을 해하는 힘에 저항하고자 하는 청춘의 육체와 정신에는 무참한 고통이 가해진다. 동경해 마지않는 시인 윤동주의 육체와 정신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프레임 너머에서 지키는 것만으로 나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무엇에 의해 죽어지는 청춘은 무엇을 위해 죽어지는가. 영화 <사도>에서 “내가 죽으면 나라가 망하지만, 네가 죽으면 300년 종사가 보존된다.”고 오만하게 소리치던 영조(송강호)는 훗날 정조(소지섭)에게 “왕이 무엇이냐, 신하가 무엇이냐. 이 할아비는 37년간 옥좌를 지켰지만, 이제는 왕이 무엇인지, 신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오만이 초래한 참극. 돌이킬 수 없는 후회. 허상의 증명. 권력에 의해 사도(유아인)는 죽어버렸는데. 후미코는, 허상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 또한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허상의 증명.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느 시대에서든지 실존을 향하여 투쟁하는 청춘은, 갈앉지 못하고 부유하는 먼지와도 같이 하찮고 불안하다. 그러나 부는 바람에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먼지다. 하이데거는 실존의 존재 방식이 ‘불안’이라 말한 바 있다. 불안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안하기 위하여 청춘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실존하는 방법이기에. 오늘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운다.

    

이준익 감독     

이준익 감독.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의 작품은 차츰 차츰. 갈수록 간소해지고,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서사를 펴나가는 데 불필요한 것들을 치우고 몰입하며, 여전히 흔들리고는 있지만 감독의 뇌리에 머무는 생각이 무엇인지 관객은 점점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물의 특성을 발랄하게 과시하면서도 인물들이 조화롭게 연대할 수 있도록 인물관계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주, 조연의 경계를 퇴색하고, 저마다의 인물이 조화롭게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떠한 면에서 페미니즘의 실천으로 읽힐 수 있다.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가네코 후미코     

작품을 거칠수록 여성 캐릭터가 더욱 주체적으로 변하는 것 역시 주목할 만 하다. 영화 <동주>의 쿠미와 여진을 넘어 <박열>의 후미코라니. ‘동지로서 활동할 때에 남녀의 구분이 없기로’ 한 후미코와 박열의 동거 서약은 얼마나 건강하고 당당한 약속인지.     


아나키스트     

간명하게는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두산백과)’으로 정리한다. 이 정리에 따르면 나는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그럴 주제가 못 된다. 다만, 실존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존을 해치려는 존재에 저항하는 것이 아나키스트라면, 나는 노력중이다. 아나키스트. 날마다 청춘이기 위해, 떨고 몸부림치면서도 불안을 피하지는 않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앞질러 가지 못하고 늦되어도. 다른 수많은 청춘들처럼.

청춘. 아나키스트.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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