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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Nov 05. 2017

김종관 감독 세 번째 이야기, <조금만 더 가까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들에 대해 연달아 이야기 해보고 싶었던 까닭은, 그들로부터 어떠한 설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더 테이블, 2017>) 나는 미약한 가능성을 발견해서 설렘을 느꼈다. 두 번째로 그의 영화를 보았을 땐(<최악의 하루, 2016>) 조금 더 간지러워졌다. 세 번째 영화를 보면서는(<조금만 더 가까이, 2010>) 내 안 어딘가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를 쓰고 싶었다.     


미약한 가능성, 간지러움, 사각거리는 욕망은 영화 속에 드러난 ‘연계성’으로부터 파생한 것이었다. 연계성에 대한 감독의 계속된 성찰을 나는 감독의 고집이라고 표현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감독의 고집이 아니라 나의 고집이었을 것이다.     


김종관 감독 시리즈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극 중 인물들 사이에 존재하여지는 위계에 대해, 영화 <더 테이블>이 그것을 설정하고 표현해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 <최악의 하루>를 보고 쓴 두 번째 글에서는 관계에 처한 인물에게 쏟아지는 질문들과 규정들, 진정(眞情)에 대한 요구들이 어찌하여 폭력적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고, 영화와 일상에서 한가지로 여성의 정체성이 외부의 힘들에 의해 몹시 무감하게 한정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모든 이야기들은,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본 후에 말해진 것들이었다. 나는 그가 만든 영화들이 가진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의 영화에서도 몇몇 ‘불편한 연계성’들이 읽힌다. <더 테이블>의 유정과 창석의 에피소드에서 창석의 회사 동료들이 유정을 훔쳐보는 장면이나 <최악의 하루>에서 남성 편집자가 남성 작가에게 여성 기자를 언급하는 장면은 또렷하게 불편하다. 불편함은 유정을, 여성 기자를 대상화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들의 기능이 ‘불편한 연계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판하려는 데 가깝다고 느꼈다.     


동류의 이러한 이해(理解)는 그래, 어쩌면 감독의 고집이 아니라 나의 고집에서만 비롯된 이해일 수도 있다. 아무렴. 영화를 향유하는 역할로서 나는 5할의 지분을 가진 주주가 아니던가. 나의 고집일지도 모를, 영화가 담은 고집에 대해 나는 마지막으로 쓴다.     


이번에도 은희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 다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꼭 ‘은희’인 데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홀로 생각하기에는, 창작자 스스로 조금 더 이해해 보고픈 인물, 관객의 마음이 잠시 더 머물기를 바라는 인물을 은희라 호명하는 것일까 싶다.     


<조금만 더 가까이>의 은희는 관계에 미숙한 인물이다. 은희가 미숙해서, 더 마음이 끌린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사업이란 아무리 해보아도 어렵다. 주변을 최대한 완벽한 관계로 구성하기 위해 애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고초를 겪는 것은 너나의 일이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각각의 은희들은 저마다의 관계 속에서 만난(萬難)을 경험한다. 관계에 완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은희라는 이름이 아닌 인물들도 결국에 모두 은희다.     


같은 작품을 감상하였더라도 관객마다 더 애착을 주고 마음에 품는 캐릭터는 다르기 마련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각기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은희(정유미)와 운철(장서원)에게 마음이 갔다. 둘 다가 나에게는 은희였다. 은희라 호명됐다.     

은희(정유미)(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나 너 때문에 연애불구야.”

비가 쏟아지는 밤, 갑작스레 현오(윤계상)의 차 앞을 가로막아선 은희. 이들의 에피소드 전체에서 은희는 다소, 종종 폭력적이다. 막무가내로 현오의 차에 올라타고는 다짜고짜 현오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고, 그의 새로운 연인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고, 밤을 함께 보내자고 요구한다. 서사의 맥락을 보노라면, 은희의 이러한 행동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은희의 반복된 회귀.     


“너한텐 언제 적 얘기냐? 난 아직도 지금 얘기야.”

은희는, 현오가 자신과 연인이던 시절에, 자신과의 관계를 온전히 마무리하지 않은 채로 다른 이에게 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 얻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서 은희는 계속해 현오를 다시 찾는다. 겁나서, 다른 사람은 만날 수 없다. 만나도 만나는 게 아니다. 언제 적 얘긴데 지금 와서 이러느냐며 현오는 은희를 원망하지만, 은희의 토로는 그의 원망보다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 “너한텐 언제 적 얘기냐? 난 아직도 지금 얘기야.”     


은희가, 관계로부터 얻은 상처를 스스로 회복할 수 있었다면, 은희와 현오 두 인물은 그들의 관계를 깔끔하게(?) 중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은희는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테고, 현오도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라면, 은희를 비판할 수 있을까. 관계로부터 얻은 상처는 그 상처를 소유한 사람만의 몫이어야 할까. 은희의 미숙함에 잣대를 들이밀기 어려웠다.     

은희와 현오(윤계상)(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영수야.”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별의 과정이 아닌 순간을 포착한 장면이다. 영화가 품고 있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실은 하나의 이야기라면, 주인공들은 꼭 이렇게 이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수(오창석)와 세연(염보라)이 만나는 모습이 현오가 새 연인을 향하는 모습과 같았을 거라고, 그루지엑(필립 스벡)이 지난 연인을 좇는 모습이 은희가 현오를 좇는 모습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운철의 마지막 한 마디는 진부한데 쓰라리다. 갑작스런 이별의 순간에 마구 쏟아져 도시 감당하기 어려운 교란된 감정들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여서다. 마음이 돌아서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오는 것이 이별인데도, 이별에 직면하는 두 사람의 상태가 다른 탓에 이별들은 대체로 합의되지 못하고 예의가 없다. 그러한 이유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이별의 순간에 육체와 정신에 닥쳐오는 충격에는 누구든지 차분하기가 어렵다. 단 한 번의 이별의 순간이, 함축적이면서도 조밀하게 구성된 대사의 오감으로, 영화 속에서 결코 모자람 없이 이야기되었다. 운철은, 이별, 관계에 미숙한 다른 은희였다.     

운철(장서원)과 영수(오창석)(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더 테이블>과 <최악의 하루>를 지나 <조금만 더 가까이>에 닿으며, 김종관 감독이 내내 미숙한 관계들, 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 것이 좋았다. 결핍에 대한 연민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려는 마음새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내가 결핍된 존재여서 그 연민이 좋았다. 반가웠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여 주는 것이 감독의 지향이었던 덕분일 것이다. 기존의 영화에서 굳건하게 이어져 오던 인물들, 존재들 간의 고정적인 위계나 역학이 상당 부분 해제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재차, 영화에 대한 일련의 해석과 감상이 나의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나의 고집이 누군가로 하여금 결핍된 존재들, 작은 존재들의 무궁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기회가 될 만한, 겸손한 고집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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