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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Feb 27. 2016

<귀향>, 조정래 감독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군위안소 내에서 일본군이 소녀들을 겁간하는 장면에서였다. 고개를 돌려도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달려들었다. 몸이 움츠러들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전에도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가한 만행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으며 짐작해보려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눈으로 보는 것은 힘들고 괴로웠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은 도대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영화는 1943년과 1991년이 교차되는 구성 방식을 취한다. 1943년의 정민(강하나)의 혼이 1991년의 은경(최리)을 부르는 것은, 은경도 성폭행 피해자라는, 유사한 고통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결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를 지나간 역사적 사건으로만 인식하는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해의 맥락에서 영화는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신고하러 오겠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발언을 통해, ‘타자의 위치’를 점유한 이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며, 그러한 인식이 피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잔혹한 칼날이 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지 말 걸 그랬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고향에 돌아온 영희(영옥. 손숙)는 고향에 예전의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보고 한탄한다. 그 한탄의 말이 비단, 변해 버린 고향의 정경뿐만 아니라 달라진 인정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부끄럽고 죄송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 몸은 돌아왔어도 마음은 늘 거기에 있었다고, 혼자만 돌아와 미안하다고.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어찌하여 같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그것이 차마 괜찮은 것인지.

  정민도, 은경도,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녀들 모두 앞날 창창하고 꿈 많은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그 누구로부터도 절대 침해당해서는 안 될 고귀한 여성이었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상처 입힌 것은, 강자가 약자를 범해도 된다는 짐승의 논리를 두 손에 쥔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피해자들보다 힘이 강했고, 그 힘으로 저보다 약한 사람들 위에 함부로 군림했다.

  영화 속 씻김굿은,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털어버리려는 듯 격정적이었고, 그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만행을 벌인 자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씻김굿만으로 결코 한이 풀릴 수 없는 이유다.

  고맙고 또 고맙다. 영화 <귀향>이 나오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삶의 소중한 무엇을 조금씩, 혹은 많은 부분 희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귀향>이 또 하나의 촉매제가 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을 풀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 날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인제 왔느냐고,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 헤매고 헤매다 돌아온 혼들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괴불노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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