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우연하게 에펠탑 사진을 보면 울컥한다고 말했더니, 동생은 저도 그렇다 했다.
에펠 가까이 숙소를 잡고 매일 밤 에펠을 향해 걸었다고, 에펠로부터 걸었다고. 에펠의 꼭대기에서 파리의 밤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고.
참 행복해서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행복했던 기억에 기대어 울컥거리며 버티는 요즘.”
- 파리에서 돌아온 그해 겨울(2019.11.26)
센강을 향해 걸었다.
그 여행에서 숙소를 에펠 가까운 곳으로 잡은 건 언제 돌이켜봐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해가 저물 때쯤, 숙소 근처 피자가게에서 맥주 몇 잔을 마시고 나면 은은하게 취기가 오른 채 센강을 향해 걸었다. 검은 강물을 멍하니 보다, 반짝이는 에펠을 한 번 보고, 다시 강물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다시 센강으로부터 걸었다. 그 모든 순간, 파리의 밤에 나의 영혼과 육체가 먼지처럼 바스러져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되면 숙소 바로 옆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또다시 센강을 향해 걸었다. 어떤 날은 오토바이가 뒤엉켜 쓰러져 있는 큰 길가로, 어떤 날은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마르스 광장을 가로질러, 파리의 아침을 향해 걸었다. 그 광장에는 까마귀가 정말 많았는데, 내가 빵이라도 들고 있으면 호시탐탐 노리곤 했다. (역시 파리는 스케일이 달라. 비둘기가 아니라 까마귀라니.) 그 모든 순간을, 한 순간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영화 <미 비포 유>의 윌 트레이너는(배우 샘 클라플린)은, 머리에 가슴에 파리를 새긴 채 스위스에서 죽었다. 그가 떠난 뒤, 윌을 사랑하고, 윌이 사랑하는 루이자 클라크(배우 에밀리아 클라크)는 유언을 따라 파리로 갔다.
수년 전 윌이 했던대로, 퐁네프 다리를 건너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노천카페에 잔잔하게 바람을 실어다 주는 큰 나무에서는 녹빛 나뭇잎이 살랑, 떨어져 낙엽이 되었다. 그.토.록 아름답게 낙하할 수 있을까.
교통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마비된 뒤, 이전과 다른 자신으로는 결코 다시 파리에 가지 않겠다던 윌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윌의 유언장은 파리에서 펼쳐졌다.
“하고 싶었는데 못한 이야기가 있어요.
당신이 감정에 복받쳐 질질 짤 게 뻔했으니까.
이제 할게요.
집에 돌아가면 라울러 변호사가 새 출발 자금이 든 은행 계좌를 알려줄 거예요.
진정해요.
평생 놀고먹을 만큼 넉넉하진 않으니까.
그래도 자유는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는 작은 마을을 떠날 자유.
대담하게 살아요, 클라크.
끝까지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줄무늬 스타킹을 당당하게 입어요.
아직 기회가 있단 건 감사한 일이에요.
그 기회를 줄 수 있어서 내 마음도 좀 편해졌어요.
이게 끝이에요.
당신은 내 마음에 새겨져 있어요, 클라크.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어여쁜 미소를 띤 채 내게 걸어 들어오던 그날부터 쭉…
(중략)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내가 매 순간 당신과 함께 할 테니.
사랑을 담아서, 윌.”
- 영화 <미 비포 유> 윌 트레이너 유언
윌의 유언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은행 계좌를 달라는 게 아니라…… 사양은 안 하겠다.)
평생 놀고먹을 만큼 돈을 벌지도 못할 거면서,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작은 애증의 공간에 어디로든 떠날 자유를 묶어둔 것은 아닌지.
대담함을 잃고, 끝까지 밀어붙일 용기 따위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안주했던 것은 아닌지.
달려오는 기회를 똑바로 볼 생각조차 회피해 버리고 만 것은 아닌지.
너는 튄다고, 맞춰갈 필요도 있다고.
그게 노력이라고. 뭘 믿어 당당하냐고,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냐고.
그런 말들이 개의치 않았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찾지 않으려 했는지.
매 순간 스스로와 함께 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사랑을 담아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게 정말 좋아서, 한 주에 한두 번은 시립 도서관에 가 영화 관련 서적을 읽고, 연기 강좌를 듣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내가 연기를 배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함이었는데, 연기 강좌를 들으면 응당 내가 연기를 해야 한다는 건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루는 스스로를 향해 연기하는 수업이 있었다. 내 순서가 됐는데, 난 도저히 낯이 뜨거워서 할 수가 없었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기라니. 그건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이나 그것도 ‘필충만해진’ 순간에 하는 거잖아. 그걸 어떻게 내가 해.’ 이런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데, 선생님이 주문했다. “딱 한 마디만 해봐. 너한테 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니.”
“ㅇㅇ아, 사랑해”
그렇게 말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해 준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순간부터 이미 난 울기 시작했다. 그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꼭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는 나를 먼저.
Me Before You.
센강을 향해 걷다 걷다, 차라리 이곳에 빠져 죽어버렸으면 생각했다. 파리가 아니면, 자유를 모두 잃을 것만 같아서였다. 내내 그랬다.
다시 쓴다. 2018년 5월 20일을 기해 중단됐던 <도시감성인의 영화 보기> . 다시는 센강에 빠져 죽겠다는 마음 따위 먹지 않기 위해.
다시 파리에 가면 퐁네프 다리를 건너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겠다. 갓 구워 따뜻한 크루아상에 버터와 딸기잼을 바른 뒤 커피와 함께 즐길 것이다. 윌의 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