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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힐 Mar 20. 2018

<더 포스트> 그리고 <미스 슬로운>

여성이 전사가 된 이유

#ME_TOO

1월 29일, 서지현 검사가 8년 전 안태근 검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후 이곳저곳에서 “ME, TOO"를 외치는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고발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마다 이어졌다. 나 또한 이 강렬한 움직임에 빨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성폭력 피해자로 살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웬만한 희롱과 추행에는 무뎌질 정도로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Me Too'를 피할 수 있을까.  

   

#강간문화 #여자들은__겪는다

끙끙 앓고 앓다 겨우 터뜨린 비명들을 듣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정신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함께 ‘Me Too'를 외치고, 'With You'를 말하는 일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해시태그 Me Too‘는 흥분되고 설레고 승리감에 도취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외려, 추후 이어질 반격에 대비해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여자들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전개될 싸움은 전쟁과도 같을 것이란 것을. 피해자(많은 경우 여성)들의 ’Me Too'에 가해자들(많은 경우 남성)은 즉각 반격했다. “수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하느냐” “그 때 싫다고 했으면 되었지 않느냐” “사랑했다” … 단지 ‘2차 가해를 멈추라’는 말로는 부족하기에, 힘겹게 용기 내 ’Me Too'를 외친 이들, 수많은 피해자들, 그러니까 여성들은 다시 지난한 전쟁을 견뎌야 한다.     


#I_Am_A_Warrior

‘해시태그 Me Too'는 여성들이 치러온 수많은 전쟁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여성의 삶이란 언제나 전쟁과도 같다는 것이다. 참정권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며 남성들을 규탄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여성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온 기력을 다 쏟아 전쟁한다. 영화 <더 포스트>와 <미스 슬로운>은 전쟁 같은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서사한다.     


여성성이 아니라 보편인간성이다.

<더 포스트>의 캐서린 그레이엄과 <미스 슬로운>의 메들린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투쟁하는 인간이다. 캐서린은 펜타곤 문건 폭로를 막으려는 국가 권력에 맞서, 슬로운은 총기 규제를 막으려는 정치 세력에 맞서 투쟁한다. 캐서린과 슬로운이 맞서는 대상이 폭력을 용인하는 거대 권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두 여성은 투쟁하는 인간인 동시에 폭력을 거부하는 인간으로 보인다.     

두 여성은 투쟁하는 인간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훈련을 받던 어느 날 … 봄이었어. 사격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제비꽃이 보이더라고. 아주 조그만 제비꽃이. 그래, 그걸 꺾어서 총부리에 매달고는 계속 길을 갔어.’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흔히들 생명을 긍정하고 폭력을 부정하는 본성을 여성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본성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것이어야 옳다. “내 아들도 전쟁에 나갔었다고!” 캐서린은 분노한다. 캐서린 그레이엄이 펜타곤 문건 보도를 결심하는 데는 국가의 비겁과 이기가 숱한 목숨들을 사지로 내몰았고, 그 목숨들 가운데 자신의 아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경험이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캐서린이 ‘내 아들도 전쟁에 나갔었다’ 소리치는 장면은 생명을 경시한 국가권력을 향한 성토를 상징한다.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성은 지금껏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회는 그 모성이 마치 여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을 부여한 것은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할 책무는 어머니에게만, 여성에게만 주어질 것이 아니라, 마땅히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야 옳다. 마침내 캐서린이 펜타곤 문건을 폭로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최후의 순간에라도 외면하지 않아야 할 생명이라는 가치를 져버린 가해자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신념을 갖는다는, 보편인간성.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가끔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옳은 일이기에 행동한다.’ <미스 슬로운> 슬로운은 자신이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분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위험한 인물에게 위험한 도구가 주어지는 잃은 옳지 않기에 총기 규제 법안을 지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슬로운 주변의 인물들은 그녀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먼저 ‘혹시 그녀가 과거에 총기사고와 같은 불행을 겪은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한다. 여성이 어떤 신념을 내세울 때에, 그 신념이 감정적 요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여성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일 거라는 편견은 ‘히스테리’라는 단어의 어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두 번째는 ‘그녀가 사실 신념이 아니라 경력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녀의 신념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아니라, 그녀가 경력을 위해 투쟁한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논란이 되는 것은 불공평하다. 남성의 경우와 달리, 여성이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려 할 때에는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미스 슬로운은 다른 여자와 다르다던데…’라는 영화 속 남성 인물의 대사는 따지고 보면 슬로운의 능력을 인정하는 발언이 아니라 여성의 능력을 비하하는 언사다.      


신념을 갖는다는 것은 보편인간성이다. 슬로운이 가진 신념이 그 자체로 윤리적인가 아닌가를 떠나, 그녀가 신념을 가지게 된 경위 자체를 의심하는 것은 보편인간성을 무시하는 행위다. 여성에게만 ‘모성’이라는 이름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 역시 보편인간성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다. 결국 캐서린과 슬로운 두 여성이 벌이는 싸움은 보편인간성을 지향하기 위한 투쟁이다. 두 여성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다르지 않음을 당당히 드러내며, 제한된 여성관을 부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 놓고도 여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며,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했다. 이 주장은 사실이다. 나는 캐서린 그레이엄이란 이름을 <더 포스트>를 보며 처음 알았다. 미국 37대 대통령 닉슨의 이름을 숱하게 들어온 것과는 다르다. <미스 슬로운>에서 슬로운은 자신의 신념을 입증하고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산화하는 결정을 한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이 제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두 여성의 당당한 이름이 어찌하여 역사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었는지, 영화를 보며 또한 깨달았다.     

하나의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추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공경의 대상이 아닌 공격의 대상

남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과 달리, 여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면 여성은 이내 공격의 대상이 된다. 영화에 캐서린과 슬로운을 향해 쏟아지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능력을 부인하려는 시도들이 그 증명이다. 

'그녀'에게 퍼부어지는 공격의 당위는?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잠 못 드는 여성들

그래서 여성들은 도통 잠들지 못한다. 캐서린은 일거리를 침대에까지 끌고 들어가고, 슬로운은 아예 늘 각성상태에 있기 위해 약을 복용한다. 영화에서 캐서린의 분투는 ‘애씀’, ‘귀여운 노력’ 정도로 여겨지고, 슬로운의 과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캐서린과 슬로운 두 여성의 모습은, 현대 여성들이 겪는 전쟁 같은 생활을 사실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남성들의 능력 입증이 오직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인 것과 다르게, 여성들의 능력 입증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존재에의 입증을 위해 소모된다. 능력은 고사하고,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더 포스트>와 <미스 슬로운> 두 영화는 이 같은 현실을 비교적 잘 드러냈다.     

내가 여기에 있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침대 위, 흐트러져 있는 두꺼운 책, 파일들 더미에서 깨어난 캐서린의 얼굴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정하고 청초한 얼굴이 아니다. 막중한 책임에 짓눌린 얼굴이다. 나는 그 얼굴이 꼭 나의 얼굴 같았다.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고도 모든 것을 잃은 듯 했던 슬로운의 얼굴을 보면서도, 왠지 자꾸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여성들은 늘 무리를 한다. 사회의 2등 시민으로 내쳐지지 않기 위하여,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하여서는 무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포스트>와 <미스 슬로운>이 페미니즘 영화로 읽힐 수 있는 것은 도처에 무리하는 여성이 있고, 그것이 꼭 현실이며, 영화가 그 현실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_같은_여성의_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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