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리산 깜깜한 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목적지의 주차장에는 자동차 한 대 없었고 등산객들이 산행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찾는 화장실의 불도 꺼져있었다. 차에서 내려 느껴지는 공기는 생각보다 차지 않았고 조금씩 흩날리는 눈발도 많은 양이 아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3시까지 눈이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차를 타고 오는 길에 눈은 내리지 않았다. 겨울산행을 위해 준비한 옷차림을 갖추고 등산화의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혹시 몰라 스패치를 착용하고 산으로 출발했다.
정말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머리에 달린 랜턴 불이 시야의 전부였다. 주차장에서 나와 아스팔트 길을 따라 등산로를 찾아 걸었다. 곳곳에 길안내가 잘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산 길에 알게 된 사실은 그곳이 숲 속 야영과 오두막이 있는 사이트였고 짧지 않은 길이었다. 당시에는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앞만 보고 걸어 짧게 느껴진 듯하다.
등산로에 진입했고 곧 흩날리던 눈발도 사그라들었다. 바닥은 곳곳에 낙엽과 옅은 눈이 깔려있었지만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넷이 일자로 서서 서로의 발걸음을 비추며 앞으로 향했다. 골짜기에는 물이 얼어 있었고 얼음의 양으로 봐선 평소 많은 양의 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길은 많이 험하지 않았다. 바위가 많지도 않았고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도 않은 적당한 오름세의 연속이었다. 산행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갈림길이 나왔고 우린 2번 코스를 택했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알아봤을 때 가장 일반적인 코스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이었다. 크게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우리도 그 길을 택했다.
앞서가던 친구의 랜턴 불이 갑자기 흔들렸다. ‘와 미끄러워. 여기 얼음이야.’ 선두에서 걷던 친구가 미끄러졌고 뒤에 붙어있던 친구와 서로를 잡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옆으로 돌아가자.’ 골짜기를 건너가는 길 위로 물이 얼어 낙엽으로 덮여있었고 매우 미끄러웠다. 잠시의 위기를 넘어 조금 더 걷다 보니 점차 길에 쌓인 눈의 양이 많아졌다. 잠시 멈춰 아이젠을 착용하고 다시 걸었다. 대화가 많지는 않았다. 코스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산은 산이다. 계속된 오르막으로 호흡은 가빠졌고 작게나마 허벅지 근육이 올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랐고 능선에 다 달아 휴식을 취했다.
해가 뜨기 전 미명에 하얀 눈이 비췄고 공기의 색이 바뀌어 갔다.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며 회색과 파란색이 섞인 새벽의 색을 뗬다. 바람이 불며 소리가 더해지니 영락없는 겨울 새벽이었다.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곧 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내판은 100미터 남았음을 알려주었고 곧 정상에 도착함을 알 수 있었다. 20미터나 걸었을까 눈앞에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나타났고 설치된 봉과 로프를 잡아 위로 올랐다. 마치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 너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는 듯 느껴졌고. 앞선 코스와 전혀 다른 구간을 넘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한발 한발 살피며 올랐고 아래선 볼 수 없었던 상고대의 작은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구름이 많이 끼긴 했지만 강원도의 겹겹이 이어진 산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거지 이 맛에 산에 오지.’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다. 일출시간까지 15분이 남아 있었지만 구름이 많이 껴있어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 지난번 지리산에서 호되게 당했던 터라 가방에 꾸겨넣어둔 패딩을 꺼내 입고 겨울 산행의 묘미인 컵라면을 꺼냈다. 친구가 이번 산행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보온병을 열었을 때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컵라면을 익혀 먹기엔 전혀 손색없는 온도였다. 성인 남자 넷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고 평소 먹지도 않는 맥심 커피믹스까지 한잔 마시는 여유를 부렸다. 추운 날 산 꼭대기에서 먹는 라면과 커피는 말해 무엇하랴. 누구나 아는 맛이지만 기분은 결코 그렇지 않은 T.P.O. 의 끝판왕이랄까. 뭐 여하튼 그랬다.
어느덧 일출시간이 한참을 지났고 내려가야 하나 하는 순간 짙게 낀 구름 틈새로 해가 올라왔다. 기대를 거둔 지 오래였지만 빼꼼 고개를 내밀어 주는 해와 그 햇살이 얼마나 고맙던지. 오늘의 고생이 그 이른 새벽 일어나 열심히 운전해서 달려온 그 시간들이 전혀 아쉽지 않은 최고의 보상이었다. 해도 봤겠다. 급히 짐을 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산했다. 하산 길은 뭐 별거 없이 그냥 내 달렸다. 처음 산길에 들어섰던 지점에 들어서니 이제야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보였고 우리의 산행 동안 그 어느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오전 5시 20분 산행을 시작해 9시 40분 하산 완료 올해 첫 산행. 1월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