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nne National Shrine_남양성모성지
이번 여정은 계획에 없는 일정이었다. 스리랑카 전역의 가보고 싶은 나만의 순례 지도를 그리고 있었지만 사실 칼피티아는 목록에 없었다. 게다가 바다와 맞닿아 있는 거대한 라군을 품은 관광지인 이곳은 가톨릭 문화권인 니곰보, 칠라우, 마나르와 같이 순례지로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다. 11월부터 3월까지가 관광시즌이니 이 길은 신이 허락하고 지난해 스치듯 보았던 돌고래가 초대한 어느 멋진 날이라고 해두자.
처음 이곳의 정보를 찾으며 가장 눈에 띄었던 건 ‘National’이라는 명칭이었다. 스리랑카 서부 최북단 자프나부터 네곰보까지 가톨릭 벨트를 따라 자리한 수많은 성지와 성당 중 왜 이곳이 스리랑카 주교회가 인정한 장소이자 스리랑카 내 최초의 성지가 되었을까? 그런데 또 이곳은 왜 이렇게 알려져 있지 않은 걸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고자 하니 이제야 보게 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번엔 출발이 금요일 밤늦은 시간이었던지라 콜롬보에서 올라오는 길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퍼랄람타군 (Puttalam Lagoon) 라군을 차창 밖으로 처음 마주한다. 그리고 드넓고 광활한 맹그로브 끼고 한적한 길을 달리다 보면 도로에서 St. Anne national Shrine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성지로 들어가는 큰 길목엔 St. Anne 성인과 소녀 성모 마리아님이 이곳에 오는 모두를 반갑게 맞아주고 계신다. 처음엔 응?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마리아님이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St. Anne 성인의 손길 아래 저 어린아이가 자라 우리의 성모 마리아가 되셨다니… 양갈래 머리를 곱게 딴 여린 소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저 바라만 보다 사진 찍는 것도 깜빡하고 말았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도 누군가의 딸이었구나. 그리고 그를 세상에 있게 한 St. Anne 성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했구나. 이렇게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움을 한 스푼 적립한다.
주변에는 성지의 이름을 딴 많은 숙박시설 등과 식당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이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지 보여 주는 예고편과도 같았다. 도착한 성지는 정말 큰 규모의 국립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고 무려 스리랑카 국영 통신사인 SLT의 후원을 받아 시설이 관리되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장소가 하나 둘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니 오랜만에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멀리서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익숙한 성가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마침 아침 미사가 시작되어서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종을 닮은 조형물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건가 상상력을 펼치고 있던 찰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St. Anne 성인을 형상화 한 모습이었다. 머리 주변엔 성인의 상징인 후광이, 망토 옆에는 지팡이와 묵주 디테일까지 있었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그렇게 우리는 St. Anne 성인을 ‘통하여’ 주님의 품으로 나아갔다.
입구에서부터 성당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는 서슬 퍼런 칼을 닮은 십자가가 놓여 있다. 도깨비 가슴에 꽂혀있음 직한 십자가는 이 장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사람들을 십자가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성물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그들만의 간절한 표현일 것이다.
십자가를 중앙에 두고 두 갈래로 난 오솔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펼쳐져 있다. 마침 3처를 지나는 길 가운데 기도문을 외우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다리가 불편한 형제님이 거동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다니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계셨다. 문득 매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십자가의 길을 걷던 외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손을 잡고 미사 보는 게 인생의 큰 기쁨이라 하셨다. 무릎이 안 좋은 할머니의 십자가의 길이 나에겐 늘 위태로워 보였지만 언제나 아직 이 길을 직접 걷도록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다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신앙의 안내자이자 St. Anne 성인과도 같은 내 삶의 수호자이다. 새삼 내가 얼마나 큰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존재인지 은총이 눈처럼 내려와 가슴속에 소복이 쌓인다.
원래 성지 순례 속의 미사는 조금 더 특별하다. 성지 곳곳엔 삼삼오오 모여 앉은 가족 단위의 사람들, 흙장난하는 아이들 옆에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부모들, 나무 그늘 아래 잠깐 쉬어가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신기하게도 혼돈과도 같은 무질서 속에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까이 서 보니 미사가 집전되는 성전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신부님의 강론이 막 시작되고 있던 참이었다. 집전 언어가 영어가 아니었기에 나는 더 더워지기 전에 성지를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했다.
낯설게 생긴 외국인이 미사 시간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니 자연스럽게 어디를 가나 시선이 집중됐다. 문득 사람들의 성스러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도 같은 신앙의 뿌리를 둔 형제, 자매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순 없으니 앞으론 더위도 피할 겸 미사보를 쓰고 다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최소한 “저는 관광객이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신앙인이에요. 아버지의 집에 기도드리러 왔답니다.”라는 인사말 정도로 전해지지 않을까?
사순 시기여서 인지 고해소는 문전성시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거룩한 성전에서는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조심스레 들어선 성전엔 고요의 바다를 품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 품 안에 찬란하게 빛나는 성광이 모셔져 있었다. 하느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성전 밖과 또 다른 차원의 세상과도 같은 침묵 속에 누군가의 기도가 잔잔히 울려 퍼진다.
문득 나를 감싸는 이 충만함이 어느 가을날 남양 성모성지 작은 성전이 내어주었던 손길과 많이 닮아있음을 깨닫는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현재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있기 전, 자그마한 경당엔 따뜻함이 감돌았고 창밖으로 계절이 천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제대 위 멀리 성광처럼 보이던 평화의 모후 왕관의 열두 개의 별 성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가을 낙엽처럼 모든 것이 불안하고 흔들리던 나를 감싸 안아주던 그 온기까지 어찌 이렇게 데칼코마니 같은지. 짧은 화살기도 속에 가장 아끼는 책의 제목을 빌려 감히 나는 이렇게 응답드렸다.
“ 이제 나는 알 것만 같아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을...”
평화의 모후 왕관의 열두 개의 별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 세계에 열두 곳,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장소에 현시된 특별한 제대라고 한다. 폴란드에 본부를 두고 있는 ‘평화의 모후 협회’(Communita Regina della Pace)에서 장소를 선정하고 교황님의 축복을 받아 전 세계의 선택된 성지로 가게 되는데 남양성모성지엔 2017년 여섯 번째로 안치되었다. 세 폭의 병풍형태로 펼쳐지는 제대의 좌우엔 예수의 토리노 수 모양이 새겨져 있고 좌우를 닫으면 갈라진 남북이 기도와 통일로 일치하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이 신비로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곳이 북주주라는 것을 간과했었던 걸까.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듯한 더운 날씨에도 함께해 준 다른 종교의 동행들 그리고 수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조금의 아쉬움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여정 속에서 그동안 내가 받았던 넘치는 은총을 느끼며 이제 나도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청해 본다. 오늘 흘린 땀의 반이라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특히 앞으로도 이곳 스리랑카의 신앙 속에서 머물며 그들의 빛나는 발자취를 소중히 기록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