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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May 08. 2022

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

St. Eugene de Mazenod Church

나는 쓰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내 안에 담겨있는 모든 언어가 고백인 순간엔 더욱 그렇다. 담담히 독백처럼 써내려 가는 손끝엔 산들바람이 불듯 평정심이 찾아오기에 매일 저녁 편지 쓰듯 일기를 꼭 쓰는 편이다. 그날의 생동감 있는 목소리가 담겨있어 나에겐 좋은 글감 노트가 되어주기도 하고, 어느 날엔 특별한 시공간 속으로 다시 짧은 여행을 허락하기도 한다. 최근 적었던 일기를 보니 지난 여행길 사랑스러운 색감으로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성당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불교 신성도시 아누라다푸라에서 우연히 만난 연보랏빛 성당 St. Eugene de Mazenod Church이다.


스리랑카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진짜 지금 이 길에 숙소가 있다고?라고 생각되는 곳이 많은데, 이번에도 목적지 근처를 헤매다 유달리 눈에 띄는 성당을 발견했다. 어느 동화 속 공주님이 살고 있을 듯한 보라색 빛깔의 색 조합에 무엇보다 핑크색 십자가라니! 일단 여행 당일은 불교의 날이었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잠시 누르고 새해 첫날 마나르로 향하는 긴 여정의 마중물로 이곳과 함께했다. 가까이 보니 성전은 정말 꺅! 소리가 날 정도로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성당 담장에 연 보랏빛 문양, 성 에우제니오 (프랑스어라 이렇게 불리는 듯) 성인상 그리고 마당엔 청초한 꽃들의 향기가 가득하다.

보라색의 향연.. 어떻게 멈추지 않을 수 있나요
 소박한 것들이 만드는 신비스러운 하모니 

작고 소담한 그림같은 공간 


미사 시간이 성전은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주시지만 작은 본당이라 들어가도 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니 흰머리 소녀 같은 수녀님이 계셨다. 천주교 신자이고 잠시 성전을 둘러봐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니 직접 성전 투어를 해주신단다. 우선 가장 먼저 이 성당을 지켜주시는 에우제니오 성인께 함께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정성이 소담스럽게 열린 성당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어떤 과함이나 부족함 없이 애초에 모든 것이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조화롭다. 


특히 공간적 구조와 색감 배합이 인상적이었다. 성모님을 둘러싼 꽃들의 배열, 성전 내실로 들어가는 자색 커튼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분명한 이곳만의 분위기가 살아있었다.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소중한 우리 동네 예쁜 본당 느낌! 수녀님은 본당이 에우제니오 성인의 영성에 따라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을 전하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종교의 제약 없이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장 낮은 곳까지 미치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본명이 무엇인지 물어보셔서 “율리안나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내내 진지하던 수녀님의 얼굴에도 살짝 반가움의 미소가 번진다.

한줌 빛은 쏟아지고 사진찍는 것은 수줍은 수녀님
정겨운 풍금소리와 아이들의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순백의 투명한 그 얼굴처럼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어쩐지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공간에 머물다 보니 국내에 있는 아담한 한 닮은꼴 성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숨겨진 동네라는 뜻을 가진 은이성지. 천주교 박해시절 산기슭에 만들어진 작은 교우촌이다. 새하얀 얼굴이 고귀한 성모님을 닮았지만 위대한 한국 교회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이 첫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파견될 수 있도록한 역사와도 같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조선 땅 이곳에서 처음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까지 마지막 미사를 드리셨다. 소년 김대건 신부님이 자라난 이땅을 시작으로 김대건 신부님이 묻힌 미리내성지까지 10.3km의 청년 김대건 순례길이 열려져 있다. 언젠가 소복히 눈이 쌓인 어느날 신부님의 생애를 따라 그 길을 따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성전의 빛을 밝히는 사람들 


다시 성당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서는 아직 이곳을 단장하고 관리하는 여러 사람들의 손길로 분주하다. 어린 소년들은 성전 안팎을 열심히 쓸고 닦는다. 수녀님은 신부님께도 인사드리라며 우리를 소개해 주셨다. 그런데 서브라이즈~~ 신부님은 사다리를 타고 직접 나무 위에 올라가 시설을 정비하고 계셨다. 사실 성당에 들어설 때 잠깐 인사를 하긴 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Father Kim을 안다고 하셔서 서울대교구에만 김신부님이 몇백 명 될 거라고 농담처럼 이야기 하긴 했는데 이 분이 신부님이셨을 줄이야. 가톨릭 신자로서 불교국가인 랑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성당과 성지를 글로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더욱이 반가워해 주셨다.

나무 위에 신부님
우리 성전 푸르게 푸르게 

그리고 이국의 나그네에게 조금 더 빛나는 성전을 소개해 주고 싶으셨는지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귀하디 귀한 전기 불을 다 밝혀주신다. 신부님이 수단 대신 입고 있는 뒷모습에서 ‘Oblate’라는 단어가 반짝 눈에 들어온다. 오블라띠, 에우제니오 성인 그리고 가난한 자를 섬기는 마음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한다. 노숙자, 이민자, 빈민, 병자, 위기의 아이들까지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둥지를 내어주는 오블라띠 선교수도회. 한국에선 노숙자들의 쉼터인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님이 계신 수도회로만 알고 있었다. 놀라운 건 오블라띠 선교수도회는 1847년 에우제니오 성인이 직접 4명의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175년간의 교회 역사를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회의 일본-한국 지부는 무려 스리랑카 콜롬보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면 Father Kim은 김하종 신부님이셨던 것일까??!!

너희 안에서 사랑, 사랑,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해 열정을 다해 사랑하라.

성전의 불이 들어오고 사랑의 Oblate 정신도 빛난다!


정말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갔던 성당이라 여행 이후에 성당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는데, 불과 1년 전 기사 속 성당 모습은 내가 봤던 곳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 년 안에 이렇게 성당 전체가 이렇게 탈바꿈할 수 싶을 정도로 변모한 것이다.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는 말에 신부님과 수녀님이 왜 그리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셨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사가 없는 날에도 찾아와 성당을 정돈하는 아이들 그리고 직접 구슬땀을 흘리며 직접 성전을 가꾸는 성직자들이 살아가는 곳. 언젠가 정겨운 풍금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성당의 미사에 꼭 한번 함께 하고 싶다. 

1년 안에 완전히 새 옷을 갈아입은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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