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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May 25. 2022

보물섬엔 믿음이 자라난다

St. Our lady of Queen of Martyrs_한티 순교성지

스리랑카는 어디에 있는 나라예요?라는 질문에 꼭 따라붙는 나라가 있다. ‘인도' 밑에 작은 섬나라

실제 양 국은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스리랑카 북서부 마나르섬과 인도 라메스와람 섬 사이의 포크 해협 (Palk Strait)의 거리는 겨우 29km 정도 된다. 마나르 만과 뱅골 만을 잇는 이 해협은 15세기까지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담스 브리지'라고 불리는 이 비밀스러운 통로는 과거엔 바닷속 1미터에서 10미터 정도로 수심이 얕아 그 사이를 배들이 항해할 수 없었고 지금은 수심이 깊어져 위성사진으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랑카와 인도를 잇는 비밀의 문

이상하고 아름다운 마나르


인도양을 향해 비상하는 돌고래를 꼭 닮은 마나르는 지형상 오랜 역사 속 바깥세상과 섬을 잇는 관문이었다. 인도와의 교역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아랍 상인들의 발길도 이곳을 통해 다다랐다. 무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신밧드의 보물섬이 바로 랑카였다는 사실!!! 다양한 문화적 교류가 꽃을 피우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마나르는 점차 번성했지만 민족과 종교 간 충돌은 그림자도 함께 드리웠다. 지치지도 않는 열강의 침략 그리고 폐쇄적인 왕국의 무차별적 박해와 순교. 그 핏빛 기록을 보고 있노라니 서슬 퍼런 한국 가톨릭 순교사와 다른 듯 닮아있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오고 싶었다. 작년엔 잠시 출장길에 나그네처럼 목만 축였다면 최초로 랑카의 신앙을 증거 하던 순교자의 숨결이 서린 이곳에 좀 더 온전히 머물고 싶었다. 멋진 해변도, 숙소도 찾을 수 없는 그저 고깃배와 그물이 어지럽게 널린 평범한 삶의 공간을 향해 오늘도 거친 길을 달린다.  

하늘을 품은 바닷길

스리랑카에서 순교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역사가 빠질 수 없다. 16세기 포르투갈은 콜롬보에 거점을 세우고 교역 허가권을 얻으면서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이때 군대와 선교사들도 함께 들어오는데 당시 스리랑카 북부에는 인도 동부 칼링가 지방에서 온 힌두계 '칼링카 마가'가 침략하면서 자프나 왕국이 들어서던 시점이었다. 피의 시작은 1544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북부 자프나 지역 13개 마을에서 1만 명이 넘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치며 시작된다. 


자프나 왕국은 포르투갈의 군사력으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고자 처음엔 선교에 우호적인 듯했지만 칸 길리 1세 왕은 마나르 모든 가톨릭 세례자들에게 힌두교로 재 개종할 것을 요구한다. 당시 마나르 섬에는 인도 라메스와 섬에서 이주한 힌두교 사람들이 살았는데 이 지역사회의 어부들이 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1544년 10월 믿음이 자라나던 이 작은 섬에 무려 5000명의 군대가 쳐들어가 600-700명에 달하는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자신의 장남조차 처형했다니 그 무자비함이 손끝에 전해지는 것만 같다.

하느님의 품에 안긴 600여 명의 순교자들은 성전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신앙은 기회요 선물인 것을


그 순교자들의 유해가 바로 이곳 마나르 동쪽 작은 마을 토다 벨리 순교자의 모후 성당 (St. Our Lady of Queen of Martyrs' Church)에 모셔져 있다. 마나르 섬 초입에서 차로 10분을 달려 들어서야 도착하는 이곳엔 절벽 끝에 매달렸던 순교자들이 영혼이 잠들어 있다. 섬의 끝인 이곳은 산간벽지가 없어 그 어디도 숨을 곳이 없었던 사람들을 덮어주었던 마지막 지붕과도 같았다. 성지는 한낱 에 내리쬐는 햇볕에 녹아내릴 듯한 날씨였는데 그럼에도 태양을 피해 처마 밑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신자들 그리고 성전 마당을 뛰노는 당나귀까지 평화로운 듯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1945년 스리랑카 교회는 마나르 고대 지도를 이용해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을 진행했고 당시 부서진 교회, 제단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순교자들의 흔적을 발견한다. 또한 2018년엔 마나르 포트에서 건축 공사 중 어린이를 포함한 300구의 유해가 추가로 발견됐다. 무더기로 발견되어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는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렇게 한꺼번에 수습되어 성지 마당에 두 개의 무덤으로 안장됐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중 아이들의 유해가 유난히 많았다는 것...   


예전 칠곡 한티 가는 길을 걸으면서도 무명의 아기 묘들을 마주한 기억이 있다.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를 전후하여 교우들이 몰려든 한티마을은 해발 600m 팔공산 첩첩산중에 있어 큰 교우촌이 되었지만 3년간 이어진 병인박해(1866년)로 모든 교우들이 현장에서 처형되고 마을도 불태워진다. 대부분이 순교한 자리에 안장되었고 37기의 묘 중 4기만 신원이 확인되었다. 200년을 이어온 한티의 순교자의 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 무명의 아기 묘 들이 나타난다. 비탈진 산 중턱 위태롭게 꺼진 생명의 불꽃들. 

스리랑카 교회도 이 무명의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 중이지만 사료가 부족해 그마저도 불투명하다고 한다. 한국도 각고의 노력 끝에 79위 복자 (1925년 시복) 이후 24위 복자 (1968년), 103위 성인 (1984년), 124위 복자 (2004년)의 시복시성을 받았고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박해시대 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의 이름은 대부분 전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무명 순교자가 살고, 죽고, 묻힌 삶의 터전에서 그들이 증거 한 신앙을 기억하고 고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허락된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아닐 수 없다.

매일의 신앙이 기회이자 선물인 것을 오늘도 잊고 살아간다. 믿고 사랑하고 기도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봉헌한 순교자들의 핏빛 어린 고백을 마주하고서야 깨닫기를 반복하니까 말이다. 과연 나는... 서슬 퍼런 총칼 앞에 라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움츠려 든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일, 다른 차원의 믿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기에 가능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교지를 다니면서 항상 알게 되는 건 사실 순교자들은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사랑...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심연과 연결된 ‘아담스 브리지’가 존재한다면 언젠간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바다 모래 위에서도 피어나는 생명력으로 단단한 믿음의 씨앗을 피워 내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그러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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