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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Jun 01. 2022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Shrine of Our Lady of Madhu_미리내 성지

마나르 섬을 지나 이제 내륙으로 향한다. 한낮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항상 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비구름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 후두두둑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빗방울이 떨어지고 성난 폭우는 바삭하게 달궈진 길을 한 김 식혀준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다음 행선지는 400년간 이 땅에 가장 힘없고 약한 이에게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아쉬울 것 없이 자신을 내어준 신성하고 경건한 땅, 마두 성모 성지이다.


조금씩 날이 개이고 빼꼼 얼굴을 내민 파란 하늘을 닮은 마두 성모 성지 입구가 나타난다. 다른 성지와는 달리 유달리 입구부터 신분 확인 절차가 삼엄하다. 그리고 성전의 모든 곳이 사진 촬영 금지라고 한다. 입구 사진만 몇 장 찍었을 뿐인데 무장 군인이 제지를 하고 짐 검사까지 해서 결국 카메라는 차에 두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성지로 들어서기 까지만 무려 11km에 달하는 이곳은 한 번에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품을 지녔지만 동시에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장막 속에 가리우고 있었다.

청량함이 느껴지는 파랑파랑 성모성지
여기서부터 11km를 달려야 성전이 나온다
가는 걸음걸음 눈을 뗄 수가 없는 모든 것들

피난처엔 어머니가 계신다


시작은 다시 박해였다.  포르투갈 침략의 그늘이 채 지나가기도 전 다시 이 땅을 침공한 네덜란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미 핏빛의 시간을 겪었던 마나르 신앙인들은 성모자상을 모시고 내륙 안으로 그리고 안으로 숨어든다. 그들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세상, 숲이 우거져 정글 과도 같았던 마두는 바깥세상과 차단된 십자가그늘을 내어 주었다. 이때 북부 자프나에서도 700여 명의 신자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 스리랑카 가톨릭 역사의 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성모자상이 자리한 지 100년이 되던 해. 교황 비오 11세는 어려움 속에서도 고통받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마두의 성모님께 영광의 대관을 수여한다.  지금도 성당 중앙 제단 위엔 별이 달린 왕관을 쓰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성모님이 가장 높이 이곳을 지키고 계신다.


지금은 팬데믹과 경제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지만 마두의 성모 축일인 7월 2일과 성모승천 대축일에는 무려 50-60만 명이 사람들이 마두성지의 성모님을 찾아뵙는다. 대규모 인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성전 입구에는 큰 규모의 야영장소들이 마련되어 있다. 한국에선 피정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공간에는 부활을 맞아 가족단위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족이 함께 밥솥, 생수 그리고 먹거리들을 옮기며  Eat, play and love를 위한 준비로 여념이 없다. 성모님의 발 밑에 별처럼 많은 자녀들이 은하수처럼 흐른다.

마음에만 담을 수 없어서 CCTV 앞에서... 기어이 찍고 말았네


살아있는 기도는 노래처럼


드디어 성전에 들어서는 길. 건물 앞 성물방처럼 생긴 작은 공간에서 수녀님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주고 계신다. 은박을 가위로 오린 조금씩 다른 크기의 모형이다.  사람, 바구니 등 신기한 모양으로 가득해서 봉헌물이 의미가 궁금해졌다. 마두의 성모님은 ‘병자의 건강’을 특별히 돌보아 주시기에 봉헌물은 기적의 은혜, 질병의 치유, 가족의 화해 등 각기 다른 지향을 가진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게 제일 먼저 중앙 제대 위에 성모님을 찾아뵙고 지향하는 봉헌물을 올리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 작은 유리장에 계시지만 높은 곳에서 성전의 모든 곳을 지켜보는 눈동자는 하늘빛 망토만큼이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성가정의 꿈~ 놓치지 않을 거예요ㅎㅎ


이곳은 기도의 집이다


성전 어디에서도 노래처럼 기도가 흘러나왔다. 흥얼흥얼 나도 모르게 머무는 공간마다 작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주님이 머무는 공간에 뛰노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공간이 아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침묵과 사색이 허락된다. 기록을 남겨야 하다는 강박관념을 끝내 내려놓지 못했지만 왜 이곳에서 신자들에게 사진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항상 아빠처럼 우리를 챙겨주시는 랄 기사님은 신실한 불교 신자이시지만 성모님 앞에 한참을 머물며 처음으로 긴 기도를 드리셨다. 그저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기도 할 수밖에 없는 이 신비. 세상밖에서 본 이곳은 단단히 가리어진 장막이었지만 안에서는 세상의 짙은 어둠으로부터의 보호막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성전 그리고 하늘이 그린 그림

평화와 화합의 다리 위에 서서


박해는 끝이 아니었다. 영국 독립 후 민족 간 갈등이 조장되면서 스리랑카엔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간 정부군과 북부 타밀족 반군 간 내전이 지속된다. 이로 인해 최소 10만 명이 사망하고 2만 명이 실종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전쟁 속에서도 매년 1만 명이 넘는 두 민족의 신자들은 목숨을 걸고 마두 성지를 찾았다. 이에 유엔 난민기구는 1990년부터 성지를 전쟁 중립지역으로 설정하고 군사 행위를 금지했다. 다시금 마두는 생명을 살리는 평화의 피난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 말미 맹렬한 교전으로 수많은 포탄이 교회에 떨어지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마두 성지의 보살핌으로 1만 5천 명의 생명이 살아났지만 폭력사태의 심화되면서 결국 실향민들은 북쪽으로 피신하고 당시 성모자상 마저 잠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평화의 땅을 방문하셨다. 내전 당시 마두 성지는 두 민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왔던 만큼 교황님은 하루빨리 내전의 후유증을 떨치고 두 민족이 화합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다행히 지금 마두 성지에선 타밀족과 싱할라 족이 신앙이 허락한 형제자매로 공존하며 서로 다른 언어로 번갈아 가며 미사를 드리고 있다. 교황님의 방문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Pope Francis Building 그리고 기념석이 그 역사적이 날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교황님께서 전쟁으로 인한 분열,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시는지 알기에 묵묵히 묵주기도를 하며 걸으셨다는 그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머문 자리에 발자국 총총


몰려오는 먹구름 그리고 차창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퍼붓는 거센 빗줄기에 오늘 여정의 시작이  요란스럽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길은 성모자상을 품에 안고 마나르 섬에서 내륙으로 수풀을 헤치며 걸어온 바로 그 고난의 길이었다. 포탄이 터지는 내전 속에서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생사의 절벽에  사람들에게  땅은 언제나 깊고 넓은 품을 내어주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초인적인 용기는 혹여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몰래 빼내어 품에 안고 험한 산길로만 150 리를 걸어 모시고 왔다는  청년의 여정에 감히 빗댈  있을까?  

산속에 화전을 일구고 사는 신자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가 되었다는 안성 미리내 성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이 이곳에 잠드실 수 있었던 건 새남터에서 순교한 신부님을 처형당한 지 40일이 지난 다음에야 이민식 빈첸시오가 간신히 시신을 빼내어 일주일을 등에 지고 자신이 사는 미리내 교우촌으로 옮겨왔기에 가능했다. 포졸들에게 발각될까 밤에만 먼 길을 숨어 걸어야 했던 그 절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아득했던 시절 신앙의 지도자를 지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마나르에서 마두까지,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시공간은 달라도 깊은 산속 옹달샘을 향해 그렇게 순교 하 듯 발걸음을 옮기던 마음은 분명 하나였을 것이다. 또 바삐 다음 행선지로 가는 하늘 위로 수채화 같은 무지개가 떴다. 맑게 개인 마음에 선물 같은 시간을 일곱 빛깔로 칠해본다. 오늘도 내려주신 모든 축복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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